나의 삼촌 브루스 리 2 (완결)
“산다는 것은 그저 순전히 사는 것이지,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이소룡)
어차피 인생이란 납득할 수 없는 한 편의 부조리극
그것이 비극이든 희극이든 우리는 꾸역꾸역 살아남아 각자의 역사를 남겨야 한다!
희대의 이야기꾼 천명관이 오랜만에 펼쳐 보이는 굵직한 서사의 향연!
격동의 한국현대사 속에서 질기고 순수하게 살아남은 한 남자의 인생 유전
천명관이 강렬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왔다. 한국 문단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작품『고래』이후, 그만의 선 굵은 장편 서사를 기다려온 독자들에겐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존 소설의 영역을 훌쩍 뛰어넘어 ‘마술적 리얼리즘’의 환상적인 세계를 펼쳐 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한국적 현실의 공간 안에서 인생의 의미를 온몸으로 새겨낸 한 남자의 일대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식 근대화의 압축 성장을 거치며 평범한 개인들이 고달픈 삶을 살아내는 과정을 천명관 특유의 흡인력 있는 화법으로 담아냈다. 화자인 나의 시선으로 바라본 삼촌의 이야기는 70년대 영웅의 상징 ‘이소룡’에 대한 추억으로 시작된다. 할아버지가 바깥살림을 차려서 낳은 서자로 들어와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성장한 삼촌에게 이소룡은 비루한 자신의 인생을 구원해 줄 그 무엇이다. 그러나 태생부터 원조나 본류가 될 수 없었던 삼촌의 운명은 험난하기만 하다. 이소룡을 추종했으나 끝내 저 높은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모방과 아류, 표절과 이미테이션, 짝퉁인생에 머물게 되는 한 남자의 기구한 삶이 70년대 산업화, 80년대 군부독재와 민주화혁명, 90년대 본격 자본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진다.
“대관절 이놈의 인생은 왜 이리 신산스럽고 혹독하기만 한 것일까?”
가혹한 인생의 아이러니, 그러나 불문곡직 삶을 끌어안는 실패와 좌절의 연대기
천명관은 장편 데뷔작 『고래』에서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신화적인 상상력을 질펀한 해학과 능청스런 입담으로 녹여내면서 소위 내면문학, 사색적인 문장 중심의 한국문학에 ‘스토리텔링’의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바 있다. ‘전통적 소설학습이나 동시대의 소설에 빚진 게 없다’는 평가는 그의 소설작법에 대한 문단의 충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천명관은 자신이 70~80년대 한국문학에 크게 영향 받았다고 고백한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꾸역꾸역 자기 앞에 놓인 삶을 감당해가는 인간군상의 희비애락을 그려내는 전통적 소설양식이 그것이다. 실제로 『고래』이후 그의 작품들에선 키치적 아우라나 기이한 상상력의 전조는 약해지고, 오히려 현실에 발붙이고 살아가야 하는 고달픈 인생들에 방점이 찍혀 있다. 나아가 이번 소설에는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작가의 진지하고 애정 어린 성찰이 담겨 있다. 인생의 아이러니, 진실의 탈을 쓴 가혹한 운명과 마주한 인물들이 경험해 가는 실패와 좌절의 연대기는 어찌 보면 가학과 피학의 에너지로만 점철된 듯하지만, 그 안에서 소리 없이 자라나는 한 가닥 삶에의 열정이야말로 천명관이 추구하는 최종의 서사전략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천명관 서사의 장점과 대중적인 면모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는 듯 선명하고 힘 있는 이야기, 촘촘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장르적 컨벤션, 『고래』에서 보여준 예의 구성지고 날렵한 문장들은 과연 그가 왜 최고의 이야기꾼이라 불리는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듯한 우리네 신산스런 삶의 이야기들을 능란하게 들려주면서도 때로 그 익숙한 것들의 폐부를 가차 없이 찔러대는데, 관습과 편견을 풍자하거나 치졸한 욕망과 권력의 힘을 희화화시켜 조롱함으로써 가슴 싸한 쾌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또한 대한민국 30년 정권의 변천사를 틀거리 삼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회적 악행과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간군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써 사회비판적인 리얼리티를 더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를 움직인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콤플렉스 아니었을까?”
생의 언저리를 겉돌며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꿈과 욕망에 관한 이야기
유랑과 방외(方外)의 삶, 그리고 부서진 희망의 흔적 앞에서 기웃거리는 애처로운 자의식은 천명관 소설의 캐릭터가 갖고 있는 특징이다.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주인공들 역시 삶의 주변부를 맴도는 쓸쓸한 정서를 공유한다. 한편으로 그것은 차마 포기할 수 없는 구원에의 열망과도 맞닿아 있다. 이소룡을 정의와 완성의 이미지로 승화시켜 좇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결국엔 첫사랑 원정을 향한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삼촌,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서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여배우 원정의 러브스토리는 결국 구원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의 분신이자 삼촌의 일대기를 들려주는 내레이터인 ‘나’는 삼촌뿐 아니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고단한 인생사와 우여곡절의 사연들까지 밀도 있게 전달한다. 삼촌이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고 훗날 조폭 이권다툼의 아수라장으로 변모하는 동천읍, 상경하여 처음 인연을 맺게 되는 충무로의 북경반점, 동천의 건달들과 조우하는 삼청교육대, 액션 대역배우로 활동하면서 근거지로 삼는 충무로는 소설의 주 무대로, 그 위에서 펼쳐지는 인간군상들의 흥망성쇠는 근대화 과정 속에 피어난 한국인의 욕망과 회한을 대변한다. 근친상간에서 잉태된 독극물의 여왕 오순, 역전파 깡패 한자리 꿰차는 게 평생의 목표인 도치, 더할 나위 없이 성깔 있으면서도 한없이 외로운 화교 출신 중국집 여사장, 삼청교육대의 야차 같은 교관들, 그리고 자본과 권력의 야합으로 탄생한 영화판의 기이한 색광들까지……. 작품 도처에서 끓어넘치는 악역과 조연의 캐릭터는 이 소설을 더욱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만드는 포인트다.
작가가 영화에 보내는 긴 작별인사 같은 소설
그러나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은 10개월간 예스24 블로그를 통해 처음 선보였다. 통상 5~6개월 진행되는 기존의 소설연재에 비하면 꽤 긴 여정이었지만, 무궁무진 뻗어나가는 작가 특유의 스토리텔링에 독자들의 관심은 고조되었다. 또한 매회 연재분량마다 함께한 일러스트레이터 이강훈의 삽화는 소설의 재미를 증폭시키며 ‘나의 삼촌 브루스 리’의 캐릭터 역할을 톡톡히 담당했다. 하지만 연재 후에도 소설의 결말에 대한 작가의 고민은 오래 이어졌고, 결국 책에서는 바뀐 결말을 선택했다.
천명관의 소설엔 늘 영화에 대한 애정이 깔려 있다. 하지만『나의 삼촌 브루스 리』는 그가 영화에 보내는 긴 작별인사가 될 것이라고 한다. 작가의 청춘을 지배했고, 하여 지금까지 그의 작품세계에 중요한 영감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는 영화와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는 이번 소설에서 더욱 극적이고 애틋하게 그 소명을 다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영화처럼 멋진 인생을 꿈꾸며 극장과 TV 앞으로 꾸역꾸역 모여든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손에서 소설을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작가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어쩌면 모든 소설은 결국 실패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가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그것이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진 못하더라도, 그리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진 못하더라도 자신의 불행이 단지 부당하고 외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그래서 자신의 불행에 대해 조금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그것은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요? 나는 언제나 나의 소설이 누군가에게 그런 의미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