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의 품격
코스 요리의 시작인 빵에서 마지막인 칵테일까지
18가지 음식을 통해
서양 음식의 근본을 말하는 교양 에세이!
‘한국화된’ 서양 요리의 현주소,
당신은 과연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있는가
제대로 된 서양 음식을 즐기는 ‘외식의 고수’가 되기 위한 A-Z 가이드!
“우리의 생활수준은 절대 낮지 않다. 고급 명품이며 수입차 같은 것들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무엇을 먹고사는가. 이제 음식의 ‘상향평준화’를 통해 수준을 맞출 때가 되었다.
이를 위해 다니고 먹고 만들고 보고 읽고 쓴 경험을 한데 아울러 이 책에 담았다.”
비즈니스맨인 당신의 식생활은 어떠한가? 끼니를 때울 때는 무엇을 먹고, 데이트를 할 때는 어디를 찾는가? 외식업 규모가 68조 원에 달하는 시대. 이제 우리는 하루 중 최소 한 끼를 외식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우리의 외식 문화는?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중국, 일본, 태국 등 각국의 요리 문화가 속속 자리 잡고 있으나, 실상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카페나 빵집은 자영업을 꿈꾸는 아마추어들의 출구 없는 경연장이고, 해마다 정체불명의 아이템이 번성했다가 자취를 감추며, 으리으리한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나 호텔 레스토랑에서조차 기본을 지키지 못하는 서비스와 질 낮은 음식의 향연이다.
호화롭고 비싼 레스토랑, 대야처럼 넓은 접시 위에 달랑 한 줌 담긴 파스타를 위해 우리는 몇만 원의 돈을 치른다. 이는 정당한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가.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먹어야 하는 ‘완성도 높은’ 서양 음식은 과연 한국에 존재하는가.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고
파스타가 바다를 건너면 국물이 흥건한 국수가 된다
‘한식의 세계화’가 한때 화제가 되었다. 나라 차원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식 레스토랑을 오픈하면서 고추를 비롯한 한식의 근본인 온갖 재료를 전부 한국에서 공수했다고 한다. 그 재료가 아니면 그 맛이 날 수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결단이었으리라. 이제 그 관점을 거꾸로 하여 내부로 돌려보자. 한국에 들어선 숱한 서양식 레스토랑들. 우리는 과연 여기에 무엇을 요구하는가.
서양 음식이 뿌리를 내린 지도 한참인데 아직도 이를 평가할 기준은 부재하거나, 있다 해도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가장 대중화된 이탈리아 음식인 파스타와 피자를 보자. 전자의 근원은 빵으로, 발효로 부풀린 반죽에 토마토와 치즈가 합세하면서 오늘날의 형식을 갖추었다. 따라서 반죽 맛으로 먹는 음식이고, 실제로 그렇게 즐긴다. 다만 반죽의 발효가 민감하고 어려운 과정이라, 미국식 프랜차이즈의 대량생산에서 토핑을 강조하며 반죽의 약점을 뒤덮어 가렸다. 이를 그대로 따르는 게 한국에 널린 피자다. 반죽 맛을 내세우는 곳이 없다.
파스타는 또 어떤가. 밀 가운데 가장 단단한 종류라는 ‘듀럼 밀’을 빻아 만든 면이다. 너무 단단해 우리식 소면처럼 늘리지 못하고 메밀국수처럼 틀에 눌러 뽑아야 한다. 그래서 더 뻣뻣해지지 않도록 반죽에 소금 섞는 것을 법으로 막는다. 성질이 이렇다 보니 면을 아무리 삶아도 쫄깃해지지도, 부드러워지지도 않는다. 따라서 비빔국수나 짜장면처럼 묽은 소스를 흥건하게 끼얹으면 서로 겉돌아 옷에 튀기만 할 뿐이다. 게다가 현지에서는 ‘면맛으로 먹는 음식’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따라서 소스는 면을 가리지 않을 정도 조금만 더하는 게 맞다.
그래서 평가는 때로 아주 간단하다. 토핑이 넘쳐나는 피자, 소스가 흥건한 파스타는 잘못 만든 음식이다. 원칙을 따르지 않았다. 맛이 당연히 없고, 사실 먹을 필요조차 없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내리면 반발이 줄줄이 뒤따른다. 입맛은 ‘주관’과 ‘취향’의 영역이니 평가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음식의 ‘기본’,
주관이나 취향이 아니라 ‘완성도’가 먼저다
각종 TV 프로그램에서 요리 전문 리얼리티 쇼들이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요리 세계에서 일가를 이룬 셰프며 평론가들이 출연해 젊은 셰프들의 솜씨를 평가한다. 그들이 가장 먼저 눈여겨보고 평가하는 것은 ‘완성도’다. 음식마다 기준이 존재한다. 수프는 불지 않고는 입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우면 안 된다. 펄펄 끓는 찌개처럼 후후 불어가며 넘기는 음식이 아니다. 또한 튀김은 재료를 보호하기 위한 조리 방식이므로, 겉은 바삭하되 속은 부드러워야 한다.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옷이 거칠고 살이 뻣뻣하면 일단 실격이다.
그 단계를 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취향을 놓고 따질 수 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주관적인 영역인 것이다. 생선요리에 바닐라 향을 섞을지 말지의 문제는, 생선살이 촉촉함을 잃지 않고 잘 익었다는 점이 전제되어야 그다음에 갑론을박을 벌일 수 있다. 이럴 때에야 ‘주관’이나 ‘취향’이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측면, 즉 완성도와 취향의 사이에 정확하게 경계선을 그으려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달리 말해,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맛없는 음식의 그 ‘맛없음’은 결국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의미다. 하루아침에 생겨난 음식은 없고, 모두 문화의 토양 위에서 세월을 자양분 삼아 진화한 산물이자 유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김치를 그렇게 모시듯, 피자며 파스타 또한 마찬가지다.
마음만 담긴 음식, 마음도 없는 음식
맛없는 음식은 딱 두 부류로 나뉜다. ‘마음만 있는 음식’과 ‘마음도 없는 음식’이 그것이다. 전자는 지나치게 감성에만 매달린다. 요리의 기본은 두뇌에서 비롯되지만 기술은 몸을 움직여야 쌓을 수 있다. 기술이 없으면 완성도가 떨어지니 당연히 맛이 없다. 케이크나 초콜릿이 그렇다. 고객의 감성을 돋우는 맛과 아름다움은 끊임없는 육체노동을 바탕으로 한 기술에서 나온다. 수련이 부족하니 일단 눈으로도 맛없는 디저트가 너무 많다.
한편 후자는 그저 돈벌이를 위한 음식이다. 물론 돈벌이‘는’ 중요하지만, 돈벌이‘만’ 따지는 음식이 넘쳐난다. 파는 빵에 파는 햄을 끼우고 파는 소스를 발라내는 샌드위치는 레스토랑에서 내놓을 음식이 아니며, 그런 음식을 파는 곳은 전문점이 아니다.
그리고 이 두 경우 모두, 과학이 내미는 최소한의 손길조차 무시한다. 양자역학과 원자가속기의 과학도 아닌, 단순한 온도계와 저울의 과학임에도 그렇다. 커피를 내리는 데 커피콩을 저울로 달지도, 물의 온도를 재어보지도 않는다. 더 나은 방법이 분명히 존재하는데도 시도하지 않는 건, 게으르거나 업계의 신비(神秘)를 설정하려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스테이크를 보자. 익힌 정도와 내부 온도에 관한 데이터가 존재하며, 온도계만 꽂으면 훨씬 더 정확하게 익힐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손으로 누르는 프로들의 판별법은 하루 수천 점씩 구워대는 본고장에서나 체득할 수 있고, 숯불갈비집이 따로 있어 수요가 세세하게 갈리는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기는 쉽지 않은데도 그렇다.
당신은 제대로 먹을 자격이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서양 외식에 얽힌 소비자들의 기나긴 오해와 미신는 더욱 널리 퍼져만 갈 뿐이다. 과연 요리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대로 스테이크의 겉을 지지는 목적은 ‘육즙을 가두기 위해서’일까. 빵을 자르면 수분이 날아가서 딱딱해진다는 말은 사실일까. 소시지의 첨가물인 아질산염은 해악인가, 필요악인가. 몸에 좋다는 올리브기름은 과연 치킨 만들기에 적합할까. 국산 맥주가 맛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커피가 입에 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것은 옳을까.
영화나 만화에 등장하는, 프로 셰프나 평론가가 아닌 이상 판별할 수 없는 아득하게 전문적인 미식의 영역도 존재하지만, 최소한 음식을 주문하고 ‘속았’음을 깨닫거나, 제대로 된 음식을 두고 잘못 만들었다고 불평하는 해프닝으로부터 우리는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제 온갖 미신과 오해로부터 벗어나 좀 더 현명한 외식 소비자로 거듭나기 위해 꼭 필요한 서양 음식에 관한 지식과 교양을, 외식 코스의 시작인 빵에서부터 마지막 코스인 칵테일까지 아울러 한 권의 책으로 담았다. 당신은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자격이 있고, 또 이제부터 그래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