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예뻤을 때
한국의 대표 작가들로 시작된 소설향 시리즈
출간될 때마다 많은 독자들과 언론매체로부터 관심을 받아왔던 소설향 시리즈가 윤대녕 작가의 『장미 창』 개정판을 필두로 새롭게 선보인다. 소설향 시리즈는 한국문학의 출판 활로를 모색하고, 작가들에게 다양한 지면을 제공하며, 아울러 독자들에게 좀 더 폭넓은 작품 선택의 계기를 마련하자는 취지로 1997년 중편소설 시리즈로 시작되었다. 이 시리즈의 이름인 ‘소설향’은 소설의 향기와 소설의 고향을 아우르는 뜻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동참한 작가들만 해도 이윤기, 김채원, 이순원, 윤대녕, 배수아, 조경란을 비롯해 최윤, 성석제, 신이현, 장정일, 정영문, 이제하, 서정인, 함정임, 이응준, 김종광, 이청해, 김연수, 백민석, 이명랑, 박청호, 송혜근, 이승우까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중견작가 23명에 이른다.
소설향을 재개하며
23번째 작품인 이승우 작가의 『욕조가 놓인 방』을 끝으로 소설향 시리즈는 4년간의 공백기를 거치며 작가와 평론가군의 재선정, 원고지 500매에 이르는 분량과 책의 제작 사양 및 표지 콘셉트의 변화 등 시리즈 전반에 관해 다각적인 모색을 꾀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게 된 개정판 소설향 시리즈는 달라진 출판 시장의 흐름에 맞춰 가독성을 높인 편집과 판형, 시리즈의 통일성을 기하면서도 각 작품이 지니고 있는 색깔을 표현한 새로운 표지 디자인이 특징이다. 또한 제본에 있어서도 기존의 무선제본에서 탈피해 가벼우면서도 소장 가치를 높인 양장제본으로 전환하였다.
끊임없이 배반과 탈주를 꿈꾸는
이 땅의 모든 아웃사이더들에게 바치는 연가戀歌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작가정신 소설향 시리즈의 아홉 번째 책으로 작가 신이현의 중편소설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를 계기로 방황하다가 원조교제를 하기에 이르는 여고생 모영의 모습을 통해 평범한 소녀가 환멸스러운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도정을 그리고 있다.
장편소설 『숨어 있기 좋은 방』으로 화려하게 출사표를 던진 이래로 작가 신이현은 ‘일탈된 청춘’들에 대한 탐미적이고 애정 어린 시선을 일관되게 표출해왔다. 제도적 질서에 대한 배반과 경멸을 아무렇지 않게 행할 수 있는 그들을 통해 작가는 일상에서의 탈주를 꿈꾼다. 중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역시 이러한 신이현의 작품 경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버지 회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졸지에 집까지 잃고 모영의 가족은 어둡고 더러운 여관방으로 이사를 간다. 모영에게 그곳은 지옥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힌 승희와 친해지면서 알게 된 점박이 아저씨와 들어간 여관방 역시 퀴퀴한 냄새가 나고 비좁고 싫긴 마찬가지다. 먼 훗날 자신이 좋아하는 종태와 나눌 첫날밤을 상상하며 꿈꾸었던 “창으로 희디흰 파도를 볼 수 있는 예쁜 침대”가 있는 방은 아니었다.
반면 보더들의 화려한 비상을 볼 수 있는 동백광장은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잊게 해주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모영이 첫눈에 반한 종태가 있다. “무릎을 구부리고 두 팔을 늘어뜨린 채 앞으로 나아가는 폼이 독수리처럼 보이는” 종태의 보드 타는 모습은 하늘로 날아오를 것처럼 보인다. 타락한 현실에서 벗어나 낯선 거리, 낯선 골목길을 부드럽고 능숙하게 굴러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모영은 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절대로 저 빌딩을 넘을 수는 없을 것이며, 천 번 만 번 뛰어넘기 연습을 해도 저 푸른 하늘을 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이처럼 작가는 가정의 몰락이라는 비극적 외부현실의 세계이자 갇힌 공간을 상징하는 ‘방’과 스케이트보더들이 뛰노는 열린 공간이자 밝음과 희망을 상징하는 ‘광장’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대비시키며 주인공 모영의 내적 심리의 이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를 통한 이상과 현실이라는 상반된 세계의 극단적 대비는 모영의 죽음을 더욱더 비극적으로 만든다.
이 작품은 평범한 여고생 모영이 집안의 몰락과 함께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가깝게는 IMF라는 현실 상황을 청소년들이 어떻게 통과하고 느끼고 있는가를, 더 나아가서는 추하고 더러운 현실세계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벗어나 미지의 세계로 탈주하려는 청춘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나는 아주 불행했고
나는 무척 쓸쓸했다
고등학교 2학년인 모영은 풍족한 집에서 자란 모범생이다. 그러던 어느 봄날 동백광장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종태의 모습에 매료되고 만다. “눈을 뜨면 가장 먼저 나의 보더를 생각한다. 그는 날개도 없이 날아오른다. 꽃씨처럼 가볍게. (……) 물을 마실 때 젖혀진 목줄기를 타고 내리를 땀방울을.” 보드를 타고 광장을 가르고, 높이 점프하는 그의 자유로움이 모영을 설레게 한다. 종태에 대한 동경은 육체가 주는 신선함, 자유에 대한 갈망에 다름 아니다.
잔디가 깔려 있고, 목련 나무가 심겨진 집은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게 되면서 빚쟁이에게 순식간에 넘어가고 모영의 가족은 여관방으로 이사를 간다. 이렇게 집이라는 안전한 울타리가 사라지고 모영은 길 위에 방치되게 된다. 모영은 여전히 종태를 동경하지만, 가족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자본’이라는 굴레 앞에서 흔들리며 종태를 외면한다.
모영은 여관방으로 가지 않고 학교에서 문제아로 찍힌 승희가 있는 카페 환타에서 시간을 보낸다. 승희와 함께 길에서 만난 아저씨 두 명과 술을 마시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다. 모영의 파트너가 된 점박이 아저씨는 모영에게 또 만나자며 그때는 더 많은 돈을 주겠다고 한다. 빚쟁이들이 여관방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자 가족들은 그들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도망가다시피 이사를 가야 하는 처지로 몰린다.
모영은 점박이 아저씨를 다시 만나고 자포자기로 돈에 자신을 팔고 만다. 종태를 만나지만 모영은 예전처럼 그에게 당당할 수가 없다. 모영은 승희와 함께 진한 화장에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단란주점에 나가 술을 따르다 경찰서에 붙잡혀간다. 경찰서에서 나오는 날 종태는 모영을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같이 죽자”며 악을 쓴다. 모영은 종태가 옆에 있다는 것이 행복하면서도 불안하지만 마음과 달리 스케이드보드만 타는 그를 경멸하며 무능하다고 비난한다.
단란주점 사건으로 승희는 퇴학을 당하고, 모영은 무기정학을 당한다. 환타에서 다시 만난 점박이 아저씨와 모영은 근처 여관에서 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여관문을 나서자 종태가 기다리고 있다. 종태는 돌아서는 모영을 불러 세우고 모영의 배를 칼로 찌른다.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영이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네모나게 접어놓은 시이다.
모영의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시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그 시가 씌어졌던 전후 일본이 그랬듯이, 1997년 12월 이후 내 나라는 패전국이나 같았다”는 소설 속 진술과 같이 모영을 둘러싼 환경과 모영의 처지와 절묘하게 겹쳐진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일방적으로 희생을 당하는 것이 노인, 청소년, 유아라고 말한다. 이 말은 이미 망각되어가는 IMF시절의 악몽이 지금도 주변에 여전함을, 자본의 폭력 앞에서 힘겨워하는 청소년과 청춘들이 어른들의 무지 속에서 방치되고 있음을 환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