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꾸만 `딴짓`하고 싶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단골, 오래된 그릇, 오래된 집에만 탐닉하는 정말 특이한 남자”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 가지 일에만 집중하며 거기서 승부를 보기도 하고,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면서 재미나게 살아볼 수도 있다. 서강대학교 이기진 교수는 물리학자로서 매일 연구에 빠져 고리타분하고 단조로운 삶을 사는 사람이다. 그러나 실험실 문을 닫고 나오는 순간부터 온갖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뭔가에 미친 사람처럼 딴짓에 빠져든다.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화려하게 신경 쓰고 남의 눈치를 보며 성취하고자 하는 현실을 오히려 절제하고 단조롭게 유지하면서 살기에, 그 나머지 삶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깊이 몰입하면서 ‘딴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글을 못 읽어 학교를 그만두었던 소심한 소년이 물리학에 심취하면서 공부에 빠져들고, 아르메니아공화국, 파리, 일본의 다양한 문화를 섭렵하면서 딴짓의 고수가 되어버린 사연. 한 남자의 진지하고도 웃기며 고집스럽게 단조롭고도 비교할 수 없게 독특한 ‘딴짓’의 파노라마. 그런 물리학자가 키운 딸이 투애니원의 ‘씨엘’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
"“정신없이 지저분하고, 개집부터 조선 백자까지 별별 것이 다 널린 연구실에 앉아 몽상에 빠지는 남자”
이기진 교수의 연구실에 처음 들어선 사람은 일단 입부터 쫙 벌린다. 온갖 책과 논문 다발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군데군데 세워진 깡통 로봇은 대체 뭔가. 어떤 것은 사람 키만큼 크고 어떤 것은 저금통처럼 앙증맞다. 하나하나 이름까지 달린 이 로봇들은 파리의 아트페어에 나가 비싼 값에 팔리기도 한다. 서너 개 놓인 원색의 의자도 그가 직접 디자인해서 만든 것이다.
벽에는 심심할 때마다 그린 엉뚱한 그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고미술 상가에서 구입한 이빨 나간 조선 백자들이 장독대처럼 놓였고, 홍차를 거르는 기구가 널려 있으며, 부엌에서나 쓰일 만한 조리 기구들도 여기저기 보인다. 바닥에는 튀니지에서 사온 커다란 호랑이 조각상이 눈을 부릅뜨고 빤히 쳐다보고 있고, 어떤 책상에는 낡고 허름한 진짜 개집까지 올려져 있다. 이쯤 되면 그동안 갖고 있던 뭔가 반듯하고도 청결할 거라는 ‘물리학자’에 대한 선입견이 단숨에 깨질 수밖에 없다.
“1년에 한 번만 몰아서 옷을 사고, 매일 같은 시간에 커피를 사는 이상한 남자”
그러나 여러 연구원과 학생을 데리고 복잡한 마이크로파 물리학을 연구해야 하는 학자로서 삶의 이면은 지극히 고집스럽고 단조롭다. 고르는 게 힘들어서 바지는 오직 한 브랜드 옷만 입고, 1년에 한 번 티셔츠를 색깔별로 왕창 사서 돌려 입는다. 양복과 넥타이라곤 오직 학회 때 필요한 딱 한 벌뿐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들르기에 커피점에선 점원과 눈빛으로만 대화를 나누고, 대학생 때부터 다니던 술집만 몇 십년째 다닌다. 한창 내전중이던 아르메니아에서 2년간 연구하며 가난하지만 순수한 친구들을 사귀었고, 지도교수와 밤을 새워가며 연구하다가 사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렇게 7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귀국할 때 가방에 가득 싸가지고 온 것은 오직 책과 이빨 나간 도자기 그릇뿐. 대다수 사람들이 가장 화려하게 신경 쓰고 남의 눈치를 보며 성취하고자 하는 현실을 오히려 절제하고 단조롭게 유지하면서 살기에, 그 나머지 삶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깊이 몰입하면서 ‘딴짓’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래된 친구, 오래된 단골, 오래된 그릇, 오래된 집에만 탐닉하는 정말 특이한 남자”
그는 일본의 옛 거리와 파리의 오래된 건물을 좋아해서 1년에 한 번은 찾아가 그동안 쌓인 현대의 독을 풀고 온다. 술집도, 빵집도, 막걸리집도, 여행가면 묵는 호텔도 꼭 한 군데만 다닌다. 그래서 주인들과는 앉기만 하면 알아서 음식을 내오고, 방 키를 주는 사이가 되어야 마음이 편하다. 25년 전부터 맺어온 인연으로 1년에 한 번 연구를 위해 아르메니아에 가서 친구 집에 묵으며 가족 같은 생활을 하다 온다. 7년간 모셨던 일본의 지도교수도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초청하여 사제 간의 정을 다진다.
어딘가 약간 깨지거나 이빨이 나간 그릇에 더 애정을 느껴서 그런 가치 없는 것들을 사모아 식기로 쓴다. 고미술 상가와 벼룩시장에 내버려진 물건들을 사서 새롭게 재탄생시키는 기쁨이 크다. 오래된 집에 대한 열망을 품다가 기어이 10년 전에 창성동에 있는 작은 한옥 주인이 되었고, 혼자만 즐기는 것이 아쉬워 현재는 갤러리로 쓰고 있다. 신선한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회를 달마다 여는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오래된 것에는 흘러온 시간과 역사가 담겨 있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타임머신의 기적이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오래된 것을 알아보고 아끼는 사람의 마음에서만 가능하다. 오래된 친구와의 우정, 인간 관계도 다 마찬가지가 아닐까.
“투애니원의 ‘씨엘’ 같은 개성 강하고 당당한 아가씨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혜성같이 등장한 투애니원은 노래나 패션, 스타일, 그리고 각각의 구성원들만 봐도 비슷한 시기에 출몰한 다른 걸그룹들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특히 그룹 리더인 ‘씨엘’을 볼 때마다 다들 느꼈을 것이다. 저 어린 가수의 주저함 없는 당당함, 그리고 전혀 남과 비슷하지도 않은 개성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씨엘은 채린이의 영어 약자이고, 그 채린이가 바로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이기진 물리학자의 큰딸이다. 물리학자는 세 살밖에 안 된 씨엘을 데리고 파리에서의 다락방 생활을 감행했다. 우유를 타기 위해 무거운 생수병을 다락방까지 이고 가거나 유모차를 내리는 것이 힘들다는 것만 빼면 행복한 나날이었다. 일본에서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채린이를 유치원에 데려다줬다. 맘속으론 걱정이 한 가득이었지만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는데, 어느 날 “아빠, 일본 말로 ‘나랑 같이 놀래?’가 뭐야?” 하고 묻기에 ‘이제 됐다’ 하고 마음을 쓸어내렸다. 한적한 시골 다다미집에서 가족이 모여앉아 오직 전축으로 음악만 듣는 한적한 생활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매일 부엌 가득 향기를 풍기며 브라우니를 만들어서 학교 행사에 들고 가던 씨엘.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매일 그림을 그리는 아빠 옆에 나란히 엎드려 생활하던 씨엘의 어린 시절을 보노라면, 이런 멋진 가수로 자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