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섬
슬픔의 속살을 어루만지는 손길,
여성의 근원적 상처와 고독에 관한 이야기
한국 페미니즘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경자의
‘투쟁적 여성주의’를 훌쩍 넘어선
‘동감’과 ‘사랑’의 글쓰기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 낯선 경험처럼 느껴질 때 그 낯선 공허함을 달래줄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동안 ‘페미니스트의 언니’로서, 젠더 문제에서부터 분단 문제까지 깊이 천착해 온 작가 이경자는, 대표작인 『절반의 실패』 이후 25년간 조금씩 빚은 자신의 분신들을 이 공허함 속으로 한 걸음 내딛게 한다. ‘여성-소설가’로서의 삶에 대한 작가의 자전적 문장들은,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슬픔’이라는 정서가 동시에 ‘공감’이라는 행위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슬퍼한다는 것은 반대로 슬퍼하지 않기 위한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는 자신의 속살을 남에게 보여주는 부끄러움을 감내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작가의 ‘흉허물들’을 통해, 그 간절한 고백을 통해 비로소 이 세계의 공허함 속으로, 슬픔이라는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핵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딱딱하게 말라붙은 상처들과 진저리치는 고독의 언저리에서, 우리가 그녀의 담담한 자기고백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같은 자기고백의 거울상인 우리가 해야 할 일 또한 자명하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삶의 더께를 향해 ‘괜찮다’고 다독이는 것, 이어 슬픔의 공허 속에 함께 내던져진 건너편의 누군가에게도 ‘괜찮다’고 전해줄 있는 작은 용기를 가지는 일이다.
타자로부터 건네받는 힐링이 아닌,
자기치유에서 생성되는 자기구원의 공간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저마다 슬픔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아픔이건 그들은 그 슬픔의 즉각적인 해소(힐링)를 기대할 수 없다. 이는 타자로부터의 값싼 위로나 끝없는 현실도피로는 결코 해소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감정의 차원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공간 역시 타자의 응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쩌면 우리는 끝내 해명되더라도 영원히 해소될 수 없는 슬픔의 어떤 지점으로부터, ‘자기구원’이라는 삶의 태도를 발견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콩쥐 마리아」의 주인공 마리아는 ‘미주 이민 백 주년’이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인물이다. 그녀를 통해 미국으로 건너온 친척이나 친구들이 백 명도 넘고, 그녀와 함께하는 할머니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지만, ‘양색시’로 살아온 그녀의 삶은 그 자체로 커다란 상흔이다. “언니. 저는요. 사람을 좋아하면 그 사람이 날 싫어할까 너무너무 불안해요. 이것도 병이지요?”(19쪽)라고 말하는 마리아. 그녀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양색시’를 바라보는 남성/타자의 응시로부터 벗어나는 일처럼 보인다.
「미움 뒤에 숨다」는 ‘아빠의 죽음’을 둘러싼 모녀의 양가감정에 관한 이야기다. 요컨대 미움과 사랑이라는 개념이 함축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이해를 담보하고 있을까. 아빠에 대한 엄마의 미움이 어느 한 쪽으로 정의될 수 없다는 사실은, 딸의 입장에서 ‘절대 권력자’였던 아빠의 기억을 혼란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러한 (양가)감정의 전염, 혹은 숨어 있는 감정의 돌출이야말로, 아빠(혹은 엄마)라는 존재자를 인식하는 행위가 가진 폭력적 재단의 양상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러한 인식의 폭력성은, 분단국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만연하는 그리움의 태도를 대변하기도 한다. 「언니를 놓치다」의 경우에서 우리는 동생(명희)이 언니(세희)를 그리워하는 방식과 그리움이 만남을 통해 몰락해가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식의 단절과 폭력성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갑자기 뭉텅 주어졌던 시간. 마치 성냥불 같았다. 이제 손끝이 타들어가도록 위태롭게 남은 시간. 북측 사람들을 태우고 떠날 버스는 줄지어 서 있고 사람들은 자기 차를 찾아 버스에 올랐다. 그 중 세희도 그렇게 버스에 올랐다. 아직 명희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별은 오래 겪은 익숙한 것이어서, 이별이 뭔지 순간 둔해졌다.(91쪽)
결국 몰락해버린 만남 속에서 명희가 놓치고, 이별하는 것도 그리움을 경유한 폭력적 인식이자, 분단이라는 타자적 상황으로부터 주입된 슬픔의 맥락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 자신의 슬픔과 그리움은 여전히 괄호 쳐진 채 타자의 시간 속에서 흘러가버리고 만다. 따라서 이러한 ‘둔감함’은, 분리되고 단절된 (여성)주체의 영역과 정확히 겹쳐진다.
「박제된 슬픔」에서 이러한 서사는 더욱 깊은 질곡의 늪으로 빠져든다. 글에서 남성 주인공 ‘석’이 겪는 내?외적, 혹은 사상적 갈등은, 그의 주변에서 유령과 같은 삶을 살아낸 어머니 ‘도문집’과 외할머니 ‘질골집’, 그리고 그의 아내 ‘순옥’을 통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나아가 구수한 강원도 사투리와 예리한 심리 표현을 통해 분단 문제를 파고드는 작가 이경자의 시선은, 기존 분단 서사의 진부함을 벗어나 ‘삶의 진실’이라는 실재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괜찮다’고 말하는 당신에게
다만 「세상의 모든 순영 아빠」라는 짧고 슬픈 독백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만 하는 것은, 앞서의 ‘진실’ 혹은 ‘현실’이라는 범주에 대한 회의적 시선이 아니라 외려 미래를 향한 희망과 긍정을 엮어낼 씨줄과 날줄이다. 슬픔의 아우라에 천착하는 이 작품의 이면에는, 동시에 슬픔의 장막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강인한 소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고독의 해자(垓字)」와 「이별은 나의 것」에서 ‘여성-소설가’의 삶이 가지는 형상을 자전적 문장으로 풀어내는 것 또한 이러한 소망의 재현처럼 보인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가족 구조 내에서는 결코 함께 공감하고 아파할 수 없는, 여성-소설가라는 존재가 가진 필연적/역사적 상처를 봉합하는 작업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이미 살아온 세월만큼 혼자 되새김질을 해야 끝나는” 이별을 “후회나 아쉬움이나 사랑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228쪽)로 인식하게 하는 힘은 바로 이 작업, 즉 희망을 향한 (슬픔 혹은 진실의)해체-재구성 작업과 동일 선상에 있다.
「고독의 해자(垓字)」에서 정화는 자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발화를 통해, 비로소 소설가 엄마의 삶을 반추하게 된다.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녀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단순히 ‘가족으로서의 엄마’가 아닌, ‘가족 구조를 벗어난 엄마’라는 예외상태를 지시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별은 나의 것」에서는 직접 이 예외상태를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이별을 담담하게 현실로 만들어가는 그녀의 눈물은, 자신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제도’라는 상부구조에 기대지 않는 자기-혁명적인 노력의 일환이다.
그래서 마침내 우리는 「건너편 섬」에서 주인공 금자가 자신의 마음 속 ‘금자 씨’에게 하는 말, “괜찮아요, 금자 씨”(254쪽)라는 언표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독백이 여성-주체 혹은 여성-소설가의 삶을 모종의 따뜻함으로 감싸기 때문은 아니다. 반대로 이러한 언표를 통해 그녀가 감정의 기저에 숨겨둔 것, 즉 ‘괜찮지 않았다’는 냉정한 과거완료와 ‘괜찮을 거야’라는 두루뭉술한 가정적 미래 모두에게 저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작가 이경자의 고백을 통해, 여성이 자신의 ‘현재’를 (재)확인하는 것은 다분히 가부장적 구조나 제도적 폭력의 호명에 저항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생활’을 지속하는 자기구원의 방법론을 획득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배우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