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이야기에 들린 작가, 오현종
그 섬세한 손끝이 그려낸 고색 모던한 복수 활극!
다채로운 상상력으로 장르 간의 경계를 해체해온 소설가 오현종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이 출간되었다.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낱낱이 흡수하여 문학의 장(場) 안으로 끌어들이는 그녀가 이번에 눈을 돌린 장르는 화살과 표창이 날고, 검광이 번득이는 무협 서사다.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자객열전」 속 인물 ‘섭정’에 매료된 오현종은 이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 줄기를 뻗어나간 끝에, 2010년부터 동명의 단편소설들을 연작 형식으로 발표한 바 있다. 단편 한 편으로는 속에서 끓는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어 연작소설로 이어나가고, 급기야 장편의 형태로 완성해내기 위해 오랜 시간 개고를 거듭한 작가의 집요한 노력은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하고자 하는 열망’의 대변이기도 했다. 오현종의 각고(刻苦)의 결정체인 이 소설은 가상의 무대를 활보하는 자객들의 끝없는 복수극이자, 옛이야기의 요소들을 현대의 섬세한 감수성으로 녹여낸 한 편의 예술이다.
반전되는 선, 지탱하는 악
이야기는 액자 밖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수를 꿈꾸며 온갖 책들에 파묻혀 복수에 관한 문장을 모으는 사내가 있다. 그에게, 역시 복수만이 삶의 전부인 여인 ‘정(貞)’이 다가와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액자 안에서 확장되는 그 흥미로운 이야기에는 피 묻은 칼로써 나라를 제 손에 틀어쥔 극악무도한 재상이 등장한다. 온 사방이 그의 적인지라, 재상은 방이 마흔 칸이나 되는 구불구불한 미궁을 만들어 그 안에서 매일 밤 침소를 바꾸며 생활한다. 어느 밤 솜씨가 뛰어난 한 자객이 재상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자객은 제가 죽은 뒤 남을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얼굴 가죽을 벗겨서 씹어 삼키고는 숨을 거둔다. 이 사건을 구심점으로 하여, 재상을 증오하지만 미궁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저히 그의 손발이 되어 악을 행해야 했던 재상의 의붓아들, 의붓아들에게 물려받은 복수심을 품고 살아가는 자객의 아이들 ‘명(冥)’과 ‘정(貞)’, 그리고 미궁 안에서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재상의 벙어리 첩 등이 번갈아가며 등장하여 관련된 진술을 겹쳐나간다.
소설 속 인물들은 더 깊은 악(惡)을 향해 가라앉아가는 듯하다. 작품 속에서 악은 읽는 것만으로 몸에 통증이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표현된다. 악의 근원, 악을 없앨 수단으로서의 악에 대한 오현종의 사유가 드러나는 이 작품에는 전작 『달고 차가운』(2013)과도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악인과 선인은 점점 얼굴의 왼편과 오른편처럼 닮아간다. 자신의 불행을 남에게 퍼뜨려 고독감을 견디고 싶었던 재상과 그 의붓아들의 감춰진 연약함, 그리고 그들과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이 숨기고 있던 잔혹함이 뒤로 갈수록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진실에 근접해간다.
누구의 것도 아닌, 이야기
액자 안의 이야기를 듣고 난 액자 밖의 사내는 감았던 눈을 뜬다. 피가 낭자하고 살점이 튀는 이 생생한 이야기는 실제일 수도, 꿈일 수도, 아니면 벙어리나 어떤 무료한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책 속 내용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가르마 가르듯 나눌 수 없는 액자 안 이야기는 그대로 오현종이 생각하는 ‘이야기성’의 본질을 표상한다. 그에게 이야기란 ‘누구의 것도 아니며, 결국은 한데 뭉쳐 한길로 흐르는 것’이다. 한번 등장했다가, 비슷하면서도 또다른 형태로 변주되어 다시 나타나는 작품 속 각각의 서사처럼, 이야기는 어떤 사실로부터 피어올라 누군가에 의해 살이 덧붙고,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달되어 새롭게 태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이야기들에는 어떤 뚜렷한 경계가 없다. 이것은 오현종이 장르를 넘나들며 소설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액자 안과 밖의 관계는 어떤가.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우리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나가기 위해 길을 떠나는 액자 밖 사내의 얼굴에 한순간 재상의 의붓아들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렇게 액자 밖의 인물들이 액자 안의 인물들과 대응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소설 속의 모든 이야기가 결국 한길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옛날 옛적부터 지금까지 이어져내려온 이야기들, 그 세세한 흐름들을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볼 때, 그 모든 이야기 가지들 역시 결국은 하나의 거대한 너울로 모이게 되는 것 아닐까. 모든 이야기는 결국 다르면서 같은, 인간의 ‘운명’을 따라 흐르기에.
다른 것이 아닌,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재상의 벙어리 첩, 그녀가 쓴 자객 이야기를 읽는 자객의 딸 ‘정’, 그리고 ‘정’이 오랫동안 간직한 그 이야기를 나누어 갖고 자신만의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액자 밖의 사내. 이 세 인물은 바로 ‘이야기를 만드는 자’, 즉 소설에 투영된 오현종 자신의 모습이리라. 그가 써낸 『옛날 옛적에 자객의 칼날은』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 당신으로부터 다른 누군가에게로 유장히 이어져갈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이 책이, 내가 아는 모든 이야기 속 인물들이 한때 존재했었다는 증거가 되었으면 좋겠다.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죽고 나면 다 사라져버릴 부질없는 삶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생각이 달랐다. 누구든 자신만의 이야기, 들려줄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없는 삶이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 나는 그 믿음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_‘작가의 말’에서
영화 〈파우스트〉를 보고 그녀의 소설을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이십대 초·중반을 보낸, 그녀의 모교에 자리한 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폭설에 길들이 묻히고, 그 길들이 가리키는 방향들이 지워지고 없었습니다. “돌아버리지 않기 위해”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고, 여전히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그녀.
만물을 창조한 신과 욕망을 부추기는 악마, 두 개의 영혼이 깃들어 투쟁하는 ‘인간’ 파우스트. 그러고 보면 그녀의 소설은 고뇌하는 파우스트와 퍽이나 닮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자기 자신의 욕망은 물론 타인들의 욕망을 솔직하고 정확하게 꿰뚫는 타고난 재능이 있는 듯합니다. 그 재능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하는 동시에 계속 소설을 쓰게 하고, 그녀만의 소설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고요. 그래서인지 그녀의 소설과 맞대면하는 순간, 저는 의식 못하는 새 욕망을 가리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헤치게 됩니다. 스카프로 은밀히 가리고 있던 목의 환부를 명의에게 드러내 보이듯 아무에게도 보이지 못하던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 보이게 됩니다.
그녀에게는 또한 1934년 신춘문예 당선자인 백 살 할머니가 계십니다. 백 살 할머니와 사마천의 『사기』를 보검과 비책으로 무장한 여무사(女武士). 그녀의 고색 모던한 복수 활극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삶을 되돌려받고 싶지만 돌려받을 수 없는 자. 복수는 그런 자들을 위한 것이에요.” _김숨(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