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한국 소설문학의 희망,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장편소설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경장편소설 분야에서 한국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문학동네작가상이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김영하, 조경란, 박현욱, 박민규, 안보윤, 정한아, 황현진 등 역량 있는 신진작가들을 발굴해온 문학동네작가상의 이번 수상작은 한겨레문학상, 수림문학상,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작가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다. 십여 년이 넘는 기자활동을 통해 다져진 기민한 현실감각을 바탕으로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쳐온 작가의 다섯번째 장편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오로지 시간을 한 방향으로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근본적으로 성찰하는 작품이다. 일진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다 얼결에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그 남자의 사랑을 너무 뒤늦게 깨닫게 되는 여자, 그리고 그 남자의 칼에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 세 인물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작가는 시간과 기억, 속죄라는 삶의 본질적인 문제를 풀어나간다.
“너를 만나기 위해 이 모든 일을 다시 겪으라면,
나는 그렇게 할 거야.”
고등학교 이학년 때 자신을 괴롭히던 동급생을 살해하고 교도소에 들어갔다 나온 남자가 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자신의 아들은 그를 괴롭힌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 어머니가 있다. 가해자 대 피해자라는 구도를 내세우는 듯하지만, 소설은 누구의 말이 진실인지 드러내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 아주머니에 의해 살해될 미래를 이미 알고 있는 남자는 그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한 길이 아니라, 살인자가 될 그녀를 구하기 위한 길을 선택한다. 남자는 자신이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남아 있을 사람들을 살아가게 할 거짓말을 마련해두는 것이다.
그리고 남자의 죽음 뒤에야 여자는 그간 남자가 자신에게 했던 귀여운 농담들이 진실이었음을 알게 된다. ‘우주 알’을 품게 되었다는 말, 그래서 미래를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들. 그 말은 곧 남자가 비극적인 결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여자와 함께하는 순간을 위해 다시 그녀를 찾아왔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별과 고통스러운 죽음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오로지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오로지 한 방향으로만 살아낼 수 있다. 앞쪽에서 뒤쪽으로, 그러니까 과거에서 현재로 말이다. 이때 삶의 의미는 절대적으로 그 끝에 의존한다. 결말이 좋지 않다면, 우리는 삶의 이야기를 비극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런데 그 양상이 조금씩 다를 뿐, 삶이란 이별과 죽음이라는 상실을 언제나 그 마지막으로 예고해두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이며, 그러한 삶을 소설로 쓴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장강명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인간의 존재 방식, 그 예정된 패턴에서 벗어나기 위한 소설적 모험을 감행하는 작품이다.
“마음의 해명과 마음의 매듭을 묶고 푸는 힘에 대한 탐구,
그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의지”
등단작 『표백』으로부터 근작 『한국이 싫어서』에 이르기까지, 장강명이 줄곧 관심을 보이고 특장을 발휘해온 것은 “세계의 해명과 세계를 움직이는 힘에 대한 탐구 및 그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의지”(권희철, ‘수상작가 인터뷰’ 중에서)라는 영역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수식하는 말들은 대개 사회에 대한 통찰력과 간결한 문장과 관련돼 있었다. 그러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 영역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소년과 소녀가 텅 빈 운동장에서 나누는 풋풋한 대화, 이들을 감싸고 있는 풍경의 질감과 냄새들. 혹은 성인이 된 두 사람이 겪는 또 한번의 이별, 이때 이들의 머리 위에 떠 있을 그믐달의 슬픈 모양과 빛깔 같은 것. 그러니까 장강명은 이 작품에서 “마음의 해명과 마음의 매듭을 묶고 푸는 힘에 대한 탐구 및 그 힘을 발휘하고자 하는 의지”의 작가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은 이야기 안에서 남자가 썼던 바로 그 소설의 형식처럼 되어 있다. 사건들이 일어나는 시간 순서대로 정렬되지 않은 이야기, 페이지가 적혀 있지 않으면 결코 순서를 맞출 수 없는 이야기 말이다. 인간은 시간을 한 방향으로 단 한 번밖에 체험하지 못한다. 하지만 소설에서라면?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을 통해 어쩌면 우리는 그 패턴에서 벗어나는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