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시민의 조건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
코리안 드림에서 헬조선으로, 기적의 나라에서 죄의 국가로…
교토대 ? 서울대의 실천적 지식인, 로버트 파우저의 한국 정치 관찰기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는 것이다.”_플라톤
한국 정치에 관한 생생한 증언과 제언
테러, 전쟁, 기후 변화, 경제 성장 둔화, 고령화는 더 이상 바다 건너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남북 분단, 학벌주의, 정경 유착, 재벌 체제, 인구 절벽, 하우스푸어 등 한국만의 문제에까지 이르면 지금 한국은 위기를 넘어 총제적인 파국이 임박한 것처럼 보인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으로서 벼랑 끝에 선 한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외국인이 한국 사회의 현실에 대해 아쉬움과 답답함을 토로하며 해결책을 내놓은 일은 일견 기이해 보인다. 더욱이 ‘한국인이 알아야 할 민주주의 사용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미래 시민의 조건』이라는 책을 내놓은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 책의 저자 로버트 파우저는 1982년 한국과 첫 인연을 맺은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30년 가까이 한국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눈썰미 좋은 독자라면 주요 일간지와 영자 신문에 한국 문화, 교육, 정치 등 다양한 이슈에 관한 칼럼을 기고해온 작가이자 서촌의 한옥에 거주하며 한옥 보존 운동을 펼치는 ‘한옥 지킴이’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실상 그의 본업은 3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언어학자이자 교육자이다. 20여 년간 교토대, 서울대 등 유수의 명문대에서 영어와 한국어 교수법을 가르치던 그는 29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한국 생활을 반추해보던 중 이 시대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듯 헬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오자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한국에 관한 책을 쓰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외국인이 쓴 대부분의 한국 관련 책처럼 한국 현실과 유리된 단순하고 피상적인 관찰로 판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한 책들은 한국에 관한 낭만적 환상이나 편향적인 비판, 또는 우월감에 취한 계도가 담겨 있어 한국과의 깊은 소통을 가로막는다. 이를 주의하기 위해 일단 그는 자신이 한국에 피해를 준 제국주의 세력 중 하나인 미국 출생임을 늘 잊지 않고 수평적인 관계에서 한국을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타자이자 주변적 존재로서의 외국인의 위치는 일면 객관적인 시선 유지에 도움이 된다. 사회적인 이해관계나 선입견 없는 관찰자의 시각에서 한국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화에 대한 이러한 노력은 글쓰기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이 책을 모어인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집필함으로써 문체에 신경 쓰지 않고 사실과 주장의 명확한 전달을 시도했다.
저자는 한국의 미래와 민주 시민의 조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한국과의 인연을 밝히고 인생의 여러 시점에 한국은 어떤 나라였는지에 대해 회고한다. 또한 현재의 한국 사회가 어떤지 살펴보면서 세계 속의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한국을 만든 이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본다.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3년을 보낸 그는 한국, 일본, 미국 사람들의 특징도 흥미롭게 읽어낸다. 한국인이 지닌 따뜻한 정과 라틴적 감수성으로 문화의 차이, 민족 감정 등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며, 예의 바른 일본인이 때때로 보여주는 무례한 행동은 일본의 독특한 우치?소토 문화 속에 흐르는 집단주의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국, 미국, 일본에서 사회적 자본이 갖는 의의와 세대 간의 소통 문제를 해소할 만한 한국만의 장점도 발견한다.
저자는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 코리안 드림부터 1990년대 IMF 외환위기를 거쳐 지금의 스펙 쌓기 열풍과 부의 집중 현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영고성쇠한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면서 오래되었지만 피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결점들을 진지하게 응시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문제의 원인을 민주주의의 문제라고 인식한 그는 우리의 실상과 속내를 섬세하게 살펴보고, 압축성장의 가도에서 활기를 잃고 위기를 맞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자취를 더듬어본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내다보던 그는 개인과 집단의 균형, 배타적 집단주의의 지양, 사회적 자본의 공평한 분배 등의 비전을 제시한다. 그 실천적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무엇보다 책임 있는 시민 의식과 정치 참여를 강조한다.
좋은 나라를 위한 모범 시민의 조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일본으로 건너간 저자는 2008년 서울대의 첫 외국인 국어교육학과 교수로 부임하면서 제2의 한국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5년 만에 돌아온 한국은 예전의 따듯하고 낙관적인, 변화와 기회의 땅이 아니었다. 경제 성장, 민주화 운동, 올림픽 등 미래로 향하는 모습으로 가득한 위대한 나라는 사라지고, 사회는 경직되고 정치 갈등이 심화되고 세월호 참사가 말해주듯 서민이 불안하게 사는 죄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한국은 크게 성공한 나라이며 식민 지배와 한국 전쟁, 정치적 혼란을 거치면서도 선진국에 진입한 기적의 나라임은 틀림없다. 『이코노미스트』지의 민주주의 지수에 따르면 ‘완전한 민주주의’를 이룬 나라이며 국내 총생산(GDP)이 2만 달러 이상, 인구 5000만 명 이상이 가입할 수 있는 ‘2050 클럽’에 속한 선진 국가이다. 그럼에도 내부적으로는 나라에 대한 불신과 불만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미래보다 현재가, 공동체보다 개인의 안위가 중요해진 시대에 노인들은 소외당하고 젊은이들은 스펙 쌓기에 열중한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 모두 ‘강남’ 진입에 열중하는 이유를 사회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고 본 저자는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사회적 자본의 집중, 부와 권력의 독점을 타파해야 희망 없는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부와 권력에 대한 재분배에 대한 논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사람은 바로 시민이다. 금전적·사회적 자본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한국의 또 다른 과제를 발견한다. 미래에 대한 희망은 누가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이다. 부, 명예, 성공 등 사람마다 각기 다른 희망을 꿈꾸기 마련이지만 지금까지의 한국은 강력한 지도자나 사회 지도층이 만들어준 희망(경제 성장)에 따라 달려왔다.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공동체 의식이 강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이 무시되기 쉽기 때문에 희망은 사회 구성원들의 끝없는 소통 속에 함께 만들어나가야 한다. 시민은 개인으로서 자유를 존중받아야 하지만 동시에 공동체 ‘집단의 힘과 번영’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면 개인 스스로는 어떻게 민주 시민이 될 수 있을까? 학교, 동네 등 작은 지역 사회 활동부터 투표, 선거 후보 지지 활동과 같은 정치 참여에 이르기까지 실제적인 시민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투표는 가장 쉽고 효과적인 정치 참여 수단이지만, 투표가 곧 시민 활동의 전부인 것은 아니다. 장 자크 루소가 “국민은 투표할 때만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가 된다”고 말했듯이 선거가 끝난 후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서민의 정치 소외는 계속될 것이다. 투표는 시민 활동의 기본이고 시작점일 뿐이다. 성숙한 민주주의의 진짜 시민이 되는 길은 사회 곳곳에서 참여를 통해 자기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저자는 아테네 민주주의 시대의 상황을 빌려 참여의 중요성에 대해 한 번 더 강조한다. 영어 ‘idiot’(멍청이)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무식한 사람’이라는 말로, 당시 그리스에서는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도 않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즉 민주 시민의 조건은 수준 높은 시민 의식과 적극적인 참여 활동을 의미한다. 국가라는 공동체 안에 살고 있는 ‘국민’의 사고에서 공동체 주인으로서 책임 있는 ‘시민’으로 의식을 전환한다면 성숙한 민주주의 아래에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열린사회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