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마더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도리스 레싱 만년의 통찰력이 빛나는 또 다른 경지의 소설
사랑과 불안, 동경과 희망과 좌절, 편견과 이중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생(生)의 달콤씁쓸한 아이러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그랜드마더스(The Grandmothers, 2003년)』가 예담에서 출간됐다. 이 소설집에는 표제작 「그랜드마더스」를 포함하여 모두 네 편의 중편소설이 담겨 있다. 강렬한 현실 인식과 타고난 반골 기질로 계층과 세대, 인종과 성(性), 개인과 가족과 사회 문제를 가장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레싱은 이 이야기들을 통해 달콤한 사랑과 쌉싸름한 인생의 아이러니를 포착했다.
『그랜드마더스』가 더욱 반가운 것은 레싱 만년의 지혜와 통찰력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레싱 특유의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레싱은 이 책을 집필하는 동안 이야기를 쓰는 기쁨에 흠뻑 빠졌다고 인터뷰하면서 이 책의 순수한 스토리텔링은 이전 작품과 비교하기 어렵다고 말한 바 있다.
이 인터뷰처럼 레싱은 서로의 십 대 아들과 사랑에 빠지는 두 여자의 이야기 「그랜드마더스」부터 우연한 사건들이 겹쳐 중산층 백인 남자의 아이를 가지게 된 하층민 흑인 여자의 이야기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 가상의 풍요로운 고대국가인 로다이트 왕조의 이해할 수 없는 쇠락사 「그것의 이유」,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원한 사랑이라 믿고 싶은 운명에 휘말려 평생 자신의 사생아를 기다리는 영국 군인의 이야기 「러브 차일드」까지 다채로운 문체로 매혹적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러나 그 이면에 공통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결국 사랑과 인생이다. 각각의 인물들이 특정한 공간에서 특정한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드러나는 인간성과 감정은 사랑과 불안, 동경과 희망과 좌절, 편견과 이중성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생(生)의 달콤씁쓸한 단면을 절묘하게 드러낸다.
영화 〈투마더스Two Mothers〉의 원작 소설
반짝이는 사랑을 향한 욕망과 자기기만,
그리고 불가피한 상실에 관한 이야기
「그랜드마더스」에서 ‘친자매’ 혹은 ‘쌍둥이’ 같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단짝 친구 릴과 로즈는 평생 이웃해 살면서 아름다운 여인으로 성장하여 비슷한 시기에 결혼하고 똑같이 아들(릴의 아들 이안과 로즈의 아들 톰)도 하나씩 둔다. 릴과 로즈를 중심으로 두 가족은 대가족처럼 어울리고, 릴의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이안의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 더욱 가깝게 지낸다. 릴과 로즈의 우정을 견디지 못한 로즈의 남편도 떠나고 아름다운 두 어머니 릴과 로즈, 더 아름답게 장성한 두 아들 이안과 톰만 남겨진다. 그렇게 그들이 연출하는 완벽한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세상을 속이는 사랑이 행복하게, 그러나 그만큼 위험하게 이어진다.
앤 폰테인이 감독한 영화 〈투마더스(Two Mothers)〉의 원작이기도 한 「그랜드마더스」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도리스 레싱은 이 소설에서 서로의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는 젊은 두 아들의 친구에게서 이 금기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청년은 친구들의 치명적인 관계를 부러워했다. 그들의 사랑을 낭만적이고 아름답게 묘사하면서 그 10년 동안의 사랑을 끝내려는 어머니들에게 오히려 분노하고 있었다. 레싱은 이 이야기에 매혹됐지만, 그들의 10년을 완벽한 행복으로 바라보는 청년의 시선을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레싱은 그들의 남편이자 아버지, 혹은 그들과 친밀한 관계에 있는 누군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랜드마더스」는 그림 같은 해변, 그림 같은 두 집, 그림 같은 두 가족이라는 아름다운 배경 속에서 사회적 금기와 도덕적 관습을 초월하여 서로에게 빠져드는 두 어머니와 두 아들의 이야기를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여러 사람들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풀어간다. 레싱은 그들의 사랑에 대해 어떤 판단도 해주지 않지만 그 반짝이는 사랑이 무엇까지 파괴할 수 있는지도 보여준다. 치명적인 금기의 관계일수록 사랑은 황홀하지만 그 달콤한 사랑을 향해 위태롭게 질주하는 욕망은 고통스럽고, 세상과 자기 자신의 경계를 넘은 끝에는 그에 뒤따르는 쓰라린 대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질문을 이끌어내는 것, 독자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
도리스 레싱은 “작가의 일은 질문을 이끌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바로 작가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게 우리의 기능이지요”라고 말했다. 이 같은 작가적 신념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가」는 하층민인 흑인 고아 소녀 빅토리아와 백인 중산층 가정인 스테이브니 가족을 교차시키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연갈색 혼혈아 메리를 통해 백인 중산층의 도덕성, 인종과 계급에 대한 고정관념, 개인적인 편견 등을 드러내지만 그 같은 이중성은 빅토리아도 역시 가지고 있다. 「그것의 이유」에서는 자신들이 직접 선출한 왕인 아름다운 데로드와 함께 고대국가를 통치했던 12인 위원회 중 한 명이 나라의 흥망성쇠를 기록하면서 필사적으로 어떤 이유를 찾는다. 평화롭고 풍요로우며 노래와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나라에서 최상의 통치자 교육을 함께 받았던 데로드가 왜 그 모든 기반을 부정하며 그들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나라가 황폐해지고 타락해가는 것을 방치하는지. 그 이유를 집요하게 파고들던 그는 자신들이 무엇에 미혹되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지 비로소 깨닫는다. 레싱이 지금 당신은 무엇에 미혹되어 있는가 하고 묻는 듯하다. 「러브 차일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영국 군인 제임스의 사랑과 환상과 집착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사랑만이 던질 수 있는 위대한 질문들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매번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가? 아니면 단 한 번만 사랑할 수 있는가? 사랑이라고 믿는 것 때문에 얼마나 어리석어질 수 있는가?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랜드마더스』는 아흔넷의 일기로 영면한 도리스 레싱의 마지막 소설집으로, 60여 년 작가로서 세상을 불합리하게 고착화하려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예리한 질문을 제기해온 그녀가 인생에 대해,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 인생들과 그 사랑들이 교차하는 사회에 대해 던지는 마지막 질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