꾿빠이, 이상 (개정판)
1999년이 되자, 나는 이상에 대해서 뭔가 쓰고 싶어졌다.
그 글은 나중에 『꾿빠이, 이상』이라는 장편소설이 됐다.
그 소설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나는 소설가가 아닌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_김연수(한겨레 칼럼 「소녀잡지 속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중에서)
김연수가 등단할 때부터 마음에 품은 다음의 문장에서부터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즉, ‘오빠의 데드마스크는 동경대학 부속병원 유학생들이 떠놓은 것을 어떤 친구가 국내로 가져와 어머니께까지 보인 일이 있다는데 지금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라는 이상의 여동생 김옥희의 회상으로부터 말이다.
이상의 유고소설인 「단발」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의 이름 ‘연衍’에서 그 필명을 따올 정도로 김연수의 문학적 출발점은 이상과 떼려야 뗄 수 없다. 그만큼 이상은 김연수에게 있어 중요한 화두였고 그렇기 때문에 김연수는 이상의 데드마스크와 관련한 소설을 그의 문학적 연륜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 즉 그가 가장 마지막에 쓸 수 있는 소설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기나긴 암흑기를 지나는 동안 걸려온 한 통의 장편 청탁 전화는, 어쩌면 자신에게 찾아온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했고, 그 상황에서 그는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15매씩 꾸준히 소설을 써내려간다. 그것이 그가 마지막 소설이 되리라 생각했던, 바로 『꾿빠이, 이상』이다.
다가오는 4월 17일은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논의를 촉발시키는 작가 이상의 기일이다. 기일을 맞아 문학동네는 김연수 문학의 분기점이 된 『꾿빠이, 이상』과 함께,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제13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민생단 사건’을 바탕으로 1930년대 청춘들의 모습을 담아낸 『밤은 노래한다』를 새로운 장정으로 선보인다.
빈틈의 영역, 비밀의 힘만이 우리를 솟구치게 한다.
〈데드마스크〉 〈잃어버린 꽃〉 〈새〉, 총 3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꾿빠이, 이상』은 각각 세 명의 화자가 등장해 이야기가 전개되는 서술 전략을 취하고 있다. 첫번째 장인 〈데드마스크〉는 잡지사에 다니는 기자 김연화가 어느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으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라진 이상의 데드마스크가 자신에게 있다면서, 이상 탄생 90주년을 맞이해 기자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니 그 현장에 찾아오라는 서혁수의 전화가 바로 그것이다. 전화가 걸려온 그날은 사랑하는 여자 정희의 남편이 회사로 찾아와, ‘정희는 당신과 나 둘 모두를 사랑하는데, 당신은 정희를 사랑하느냐’는 물음을 던진 날이기도 하다. 정희의 말 중 어떤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김연화는 우리 문학사상 가장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문학적 이력을 시작한 이상의 삶 그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간다. 이상이 작품을 발표했을 때 분분했던 그 상반된 태도―‘미친놈의 잠꼬대냐’부터 일백 퍼센트의 ‘불멸의 작품’이라는 평까지―는 우리에게 진실이란 논리나 열정의 문제가 아닌, 다만 그 대상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 진실 여부가 채택되는 믿음의 영역임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혁수의 형이자 아마추어 이상 연구자인 서혁민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두번째 장 〈잃어버린 꽃〉은 그가 이상 문학을 동경하며 이상과 비슷한 작품을 써오다, 마침내 이상의 삶마저 모방하며 그와 비슷한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동경대학 부속병원 물류학과에서 죽어간 이상처럼, 동경대학에 찾아가 독약을 마시며 죽어가기 전 서혁민은 ‘오감도 시 제16호―실화’라는 제목의 시를 한 편 써내려간다. 이상이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오감도」 연작을 발표할 당시, 애초에 이 연작은 서른 편으로 구성된 것이었으나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연재 15회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발표되지 않은 나머지 작품 가운데 하나인 「오감도 시 제16호」가 아마추어 이상 연구자인 서혁민에 의해 쓰이면서, 이상 문학은 다시 한번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재미 교포 출신의 이상 연구자인 피터 주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새〉는 바로 이 「오감도 시 제16호」의 진위 여부를 둘러싼 학계의 논쟁과 이 논쟁과 맞물리면서 진행되는 피터 주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양축으로 삼아 이야기가 전개된다.
세 명의 화자를 중심 삼아 이상의 삶과 문학적 이력, 그리고 그가 죽은 뒤 이루어진 수많은 연구들이 방대하게 교차되면서 우리가 몰랐던 어떤 진실이 드러나는 듯싶지만, 수많은 자료들에서 이끌어낸 사실들의 합이 곧 진실 그 자체일 수는 없듯이 자료들로는 가닿을 수 없는 빈틈의 영역에서 각자의 진실을 발견해내는 건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비밀이 없다는 것은 재산 없는 것처럼 가난하고 허전한 일이다’라는 이상의 말처럼, 그 빈틈의 영역, 비밀의 힘만이 우리를 솟구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