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와 무늬
『서른, 잔치는 끝났다』 시인 최영미의 첫 장편소설
아름답고도 잔혹한 유년의 시간, 그 서늘한 성장의 기록
시인이자 소설가인 최영미의 첫 장편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흉터와 무늬』는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50만 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하며 문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최영미 시인이, 시로 문단에 나오기 전부터 써온 소설이다. 누구나 통과해야 하지만 누구도 쉽게 통과하지 못하는 유년 시절을 시적이면서도 진실한 언어로 다루고 있다. 2005년 처음 출간한 이 책은 저자가 내용을 수정하고, 삭제하고, 추가하는 과정을 거쳐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흉터와 무늬』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자 유년의 상처를 품고 자라난 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아름다운 삶의 기록이다. 유년이라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기쁨과 슬픔, 수치심과 죄의식은 인간의 영혼에 흉터로 남고, 흉터는 그 사람을 이루는 무늬가 된다. 이 소설은 한 인간이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어떤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가, 그리고 유년의 상처는 우리를 어떤 인간으로 빚어내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유년은 지구가 억만 번을 자전해도 멸종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안에서 불멸하는 유년에 바치는 최초이자 최후의 고백
남편과 이혼하고 폭식증에 걸린 여자, 하경은 거울을 보다가 자신의 얼굴이 흉터인지 무늬인지 알 수 없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을 발견한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지만 유심히 바라보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것. 그것은 유년 시절이 남긴 흔적이다. 그 흔적은 잊었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며 그녀를 유년의 시간으로 소환한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언니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태어날 때부터 불치병에 시달리다 결국 열일곱 나이에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언니. 하경은 언니가 죽은 이후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녀를 완전히 잊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는다.
하경은 권위적인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아래에서 세 자매와 함께 자란다. 아버지 정일도는 박정희 정권에 반대한 쿠데타인 ‘반혁명 사건’에 가담한 유일한 민간인으로, 감옥에서 나온 뒤 일정한 직장 없이 사회의 변방을 떠돈다. 그는 조금만 심사가 뒤틀려도 밥상을 뒤엎어 가족 모두를 숨죽이게 만든다. 정일도의 삶은 현대사와 맞물리며 가파르게 오르내린다. 하경네 가족의 삶은 그런 아버지와 함께, 옥수수죽과 깍두기로 하루하루를 지낼 정도로 가난한 환경에서 평창동의 2층 양옥으로, 큰 폭으로 요동친다. 그 가족 안에서 하경 역시 감정의 풍랑을 겪으며 성장해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언니는 늘 숨죽이고 있는 존재다. 언니는 침묵 속에 살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반면 생명력이 강한 하경은 누구에게도 지고 싶지 않아 놀이에서도 늘 앞장을 서고, 치열하게 공부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쌓아올려간다. 하경이 가족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 동안 언니는 보이지 않는다. 언니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경의 의식 속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지 못한다. 그렇게 언니가 열일곱이 되던 해, 삼촌의 권유로 치료를 위해 그녀는 미국으로 보내진다. 그녀를 고아로 만들어 고아원에서 지내게 한 뒤 미국으로 입양이 되도록 하는 계획이었고, 그것은 현실이 되어 곧 언니는 미국으로 향한다. 그러나 얼마 후 수술에 실패한 언니는 화장되어 한줌의 재로 가족에게 돌아온다.
방송작가로 살고 있는 현재의 하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을 되찾은 후 그녀의 죽음에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언니가 어떤 과정을 거쳐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추적해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미래를 믿지 않는다. 내가 믿는 건 차라리 과거이다.”
유년의 상처는 흉터로 남고, 흉터는 나를 이루는 무늬가 된다
하경은 언니의 죽음의 진실을 추적해나가다 뜻밖의 사실을 맞닥뜨린다. 언니가 처음부터 미국에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고개를 들고, 하경은 혼란에 빠진다. 그리고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동생들과 엄마의 증언이다. 그녀는 자신이 언니를 때린 적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림자 속에 갇혀 숨죽인 채 죽음을 향해 나아가기만 한 줄 알았던 언니에게도 그녀의 삶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에 새겨진 상처들은 언니의 손톱자국이었고, 그것은 자신에 대한 언니의 저항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투쟁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흉터와 무늬』는 하경의 고통스러운 성장담을 다루고 있다. 찾고 싶은 기억과 삭제해버린 기억, 그리고 돌이키고 싶은 진실들이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유년이라는 시간의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시간이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유년의 시기는 자주 아름답고 찬란한 시기로 그려지지만 또 그만큼이나 어둡고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를 품고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유년의 상처가 있다. 그것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흉터로, 또 무늬로 우리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래서 『흉터와 무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나의 이야기이다. 아름답지만 서늘하고, 고통스럽지만 진실한 삶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