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베어 살인사건
제2회 SF 어워드 장편 소설 부문 대상 수상 작가
dcdc의 장르를 넘나드는 무차별적 해피엔딩
“그러므로 내 소설은 모두 해피엔딩이라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작가인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동화인가 싶다가 SF이고, 판타지인가 싶다가 미스터리로 맺음한다.
한국 SF의 한 미래를 엿볼 수 있는 달콤하고 쓸쓸한 8편의 곰인형 이야기!
“무엇이 가장 그리운가요?”
“포옹이요.”
제2회 SF 어워드 장편 소설 부문 대상 수상 작가
dcdc의 장르를 넘나드는 무차별적 해피엔딩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장르 작가 dcdc의 4년 만의 소설집. 《무안만용 가르바니온》으로 제2회 SF 어워드 장편 소설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한 이후, 꾸준히 써 온 문제적 작품들을 모았다. ‘곰인형’을 소재로, SF와 미스터리, 판타지와 호러, 동화와 고전을 넘나들며 장르의 문법과 규칙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하고, 자신만의 매력적인 스타일을 만들어가고 있는 dcdc의 달콤하면서도 쓸쓸한 이야기 여덟 편! 많은 독자들이 오래 기다린 dcdc 두 번째 소설집의 엔딩은?
“그러므로 내 소설은 모두 해피엔딩이라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작가인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dcdc의 하이브리드 원더랜드
어디에나 이른바 순혈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경계를 정하고 그 안에 속한 것들을 인정하는 분들이죠. 바티칸 교황청부터 마블 히어로 무비나 스타워즈 시리즈의 팬들까지 순혈주의자는 세상 모든 관심사와 연관돼 있습니다. SF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몇몇 SF 상을 둘러싸고 보수주의자들과 새로운 세대들이 대놓고 맞서는 중입니다. 보이콧도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세력화도 진행되고 있죠. 사실 SF다운 SF란 무엇이냐, 진정한 SF의 가치는 무엇이냐 같은 논의는 무의미합니다. 장르란 애초에 반경이 규정지어진 개념이 아니니까요. 황희 정승의 일화를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읽어보자면, 좋은 소란 무엇인가, 일을 잘하는 소인 것입니다. 이야기로 말하자면 재미있는 이야기가 최고죠. 만약 낯설다는 이유로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그냥 유감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래서 ‘밤과 음악 사이’가 있고 그런 겁니다.
80~90년대에 비교적 고전적인 의미의 SF와 판타지로 장르의 틀을 구성한 분들에게는 dcdc의 이야기가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좀 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는 분들이라면 아마도 90년대 후반 이후 한국에 수입된 1세대 라이트노벨을 자연스럽게 접한 분들이실 겁니다. 부기팝이나 풀메탈패닉, 이리야의 하늘 같은 수작들이 일본 아니메가 성취한 감수성을 활자 매체로 성공적으로 이식했었죠.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PC 통신에서 데뷔한 뛰어난 창작 작가군이 있었고, 일본 아니메는 세기말의 멋진 성과들을 보여주고 있었고, 일본 문화 수입 제한이 풀렸고, 고속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고…. 그 수혜를 받으면서 장르소설 및 영상물에 입문한 세대에게는 dcdc의 스타일이 익숙하게 느껴질 겁니다.
굳이 이렇게 사전 설명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dcdc의 소설은 확고한 개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개성을 좋아하거나 최소한 납득을 한 후에야 작품을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작가의 개성은 작가 자신이 책에서 언급했듯이 팬으로서의 정체성과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섞여있다는 점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른 시기에 작가로 데뷔했다면 독자층의 호응을 감안하며 글을 ‘만들어내는’ 스타일을 좀 더 일찍 시도했겠지만, 그는 오랜 습작 생활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글 속에 녹여내는 특유의 주제의식/스타일을 정립시킨 뒤에야 작가로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역시 작가 자신이 말했듯 이는 dcdc만의 장점이자 단점입니다.
예를 들어 심리묘사의 현실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들은 이 작품집을 읽고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작중 인물들에게서는 현실 감각이 거의 느껴지지 않으며, 작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욕망이 존재합니다. dcdc의 분신들이 dcdc의 이야기 속에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분신들이 소설 속에서 만나는 것들도 dcdc가 좋아하는 것들로 보입니다. 이를테면 대부분의 여주인공들의 용모나 스타일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이 일관된 여주인공들의 모델은 배우 김꽃비일 수도 있고(곧, 아작에서 다시 나올 《무안만용 가르바니온》을 참조하십시오), 그냥 이상형이거나 제삼의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라 dcdc가 자신의 취향을 세계관의 일부로 기꺼이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dcdc의 일부인 등장인물은 소설 속에서 dcdc가 좋아하는 것들과 만납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팬덤 스타일의 판타지가 리얼리티의 자리를 대신합니다. 특별한 의미에서의 팬픽이랄까요. 각각의 단편을 논함에 앞서서 이 소설집 전체가 작가와 작품 사이의 벽을 조금 특별한 의미에서 흔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장담하건대 시시한 포스트모던 소설의 실험적인 구조를 헤집는 것보다 이 작품집을 살펴보는 게 더 흥미로울 겁니다.
물론 이런 ‘팬’으로서의 정체성은 dcdc의 (무척 중요한) 일부일 뿐입니다. 그가 전략적으로 짜임새를 추구했을 때 쓰는 작품은 확실히 '보통의' 장르소설들과 더욱 가깝습니다. 이런 단편들의 작가 후기를 보면 다양한 장치를 고심 끝에 배치하죠. 그가 좋은 작가인 이유를 여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고심하면서 설계한 작품들은 확실히 목표한 대로 움직인다는 것이죠. 이렇게 잘 짜놓은 단편들과 dcdc의 팬심이 글 전체를 장악한 단편과 실험적인 단편과 에세이에 가까운 단편이 섞여서(각각의 단편이 어디에 속하는지 판별하는 즐거움을 위해 여기서 알려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 작품집은 dcdc라는 특별한 개성을 지닌 작가의 진면목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결과물로 탄생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독특한 비현실감 속에서 재미있게 꾸려진 이야기 자체를 즐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전략적으로 꾸려진 작품들과 그렇지 않은 작품들 사이의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합쳐 보면서 dcdc라는 작가의 특별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일거양득이라니,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에 이만한 좋은 선택이 또 있을까요.
혹시 몰라 단편 라인업을 첨부합니다. 얼마나 다양하고 기발한 이야기들인지 알려드리려고요.
나암 왕국 이야기
옛날 어느 왕국에 아리땁고 냉소적인 공주와 그녀를 사랑하는 드래곤이 살았습니다.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싶었던 드래곤은 이런저런 구애 멘트를 날리다가 그만 저 하늘의 별이라도 따 주겠다고 말하고 말았는데…. “따 줘.”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고 합니다.
구미베어 살인사건
잔혹하게 훼손된 시체 옆에서 발견된 구미베어. 연쇄살인인가? 세상 기구한 팔자를 가진 고교생은 어쩔 수 없이 범인 색출에 돌입합니다. 코믹하게 각색된 오츠이치풍의 잔혹극으로 시작했다가 도중에 변신하는 스타일이 재미있는 표제작.
월간영웅홍양전
약 한 달 주기로만 활약하는 ‘월간 영웅’, 시간제 여성 히어로 홍양의 비밀은 무엇인가. 곰인형의 탈을 쓴 테러리스트는 한 청년을 납치해 그 비밀을 알아내고자 합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화는 연애 상담으로 흘러가고….
구자형 바이러스
어느 날부터 구자형을 너무 좋아하는 청년만 빼고 세상 사람들이 구자형 같은 목소리로 말하게 됩니다. 어째서. 그리고 세상 모두가 구자형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청년을 뒤쫓기 시작합니다. 왜?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의 청춘개론
야자를 빼먹고 싶은데 특별한 변명이 생각나지 않을 때, 모처 화장실을 개조한 사무실을 방문하셔서 선홍지를 찾아 주세요. 간단한 트릭부터 인간의 성격적 특징을 이용한 큰 그림까지 두루 이용하는 천재적인 하교 전문가니까요.
버려진 곰인형들을 위한 만가
버려진 곰인형들이 모여서 노숙하는 데가 어딘지 아십니까. 그들이 아직 갖고 있는(또는 버릴래야 버리지 못한) 꿈은 무엇일까요. 한 방송의 다큐멘터리 팀이 그들을 취재했습니다.
손인불리심청전
심청전 어레인지. ‘어 이거 곡성인가, 패러디물인가’라고 시작하는데, 그 끝이 심히 창대합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세계였네요.
곰인형이 왔다
이게 어떤 종류의 이야기인지 몇 페이지 만에 바로 이해하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진심으로, 그이들 모두에게 행운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작가의 말
〈나암 왕국 이야기〉
소재 자체는 중학생 때 떠올린 소재다. 인물들도 마찬가지고. 내 뿌리 중 하나는 동화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동화를 쓰겠다는 목표가 있다. 하지만 인격적으로 하자가 있어서인지 동화를 쓰려고 하면 언제나 일단 동화는 아닌 무언가가 나온다. 이 작품도 내가 만들어낸, 일단 동화는 아닌 무언가 중 하나다.
귀엽고 포근하고 ‘샤방샤방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는데 불곰의 박제가 나오는 순간부터 많이 엇나가버렸다. 아니, 애초에 그냥 무리였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일단 화살을 쏘았고 그 방향이 노린 곳과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맞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를 맞혔는지 자평하지는 않겠다.
결말부의 별사탕 부분은 나름 타협한 결과물이다. 원래 내 성격대로라면 인공태양을 만들기 위해 핵융합 마법을 시도하다가 주문을 잘못 외워서 핵폭발이 일어나 왕국이 멸망하는 이야기를 썼을 텐데 동화를 쓰자는 목표 탓에 별사탕 정도로 목표치를 낮춘 것이다. 만약 초안대로 갔다면 하드 SF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들이 쟤 또 저런다고 짜증을 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품은 SF라고 생각하고 썼다. 배경은 판타지 세계관이지만 가벼운 수준의 천문학적 지식이나 운석이 지표면을 강타했을 때 일어날 사건의 묘사들 모두 과학적으로 다루었으니까.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SF 작가들은 멍청할 정도로 로맨틱한 부분이 있다. 착각하면 안 되는 것이, 여기서 강조하고픈 부분은 로맨틱이 아니라 멍청함이다. 하늘의 별을 따다 주겠다고 하면 원리는 같으니 소규모의 핵융합으로 수소폭탄을 터뜨리고, 몇백 년이든 너를 기다릴 수 있다고 하면 인공동면장치를 만들거나 아광속의 속도로 우주를 떠돌며 시간을 보낸다. 도무지 비유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맥락맹에 눈치라고는 없는 멍청한 인간들이다. 그리고 그래서 좀 귀엽다. 내 입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지만 말이다.”
? “먹고 기도하고 SF를 보라”, 〈ize〉 기고문
위 인용문은 예전에 내가 쓴 김보영 작가님의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 서평 중 일부다. 이 서평처럼 〈나암 왕국 이야기〉도 나 스스로가 SF적으로 귀여워 보이려고 쓴 소설이다. SF에 있어서든 귀여움에 있어서든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일단 의도는 그랬고 시도는 해봐야만 했다는 변명을 남긴다.
별의 개념에 있어 항성과 행성 그리고 유성은 의도적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왜 굳이 이것이 의도적이냐고 밝히느냐면, 몇몇 과학강연에서 과학자들에게 항성과 행성 그리고 유성을 다 별이라고 눙치지 말라는 지적을 받은 경험 때문이다. 하지만 애초에 별이라는 단어가 폭넓은 개념으로 사용되어온 역사를 무시하는 것이야말로 비전문적인 일이지 않은가? 세상에 참 별 걸로 따지는 사람들이 많다.
〈구미베어 살인사건〉
이 책은 더욱 작고 얇은 판형이었으면 했다. 곰 인형을 주제로 한 아기자기한 사이즈의 귀여운 표지마저 갖춘 상품을 만들고 싶다는, 뭐 그런 장삿속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급적 분량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출판사의 제안에 까짓 뭐 하나 새로 쓰지 하고는 〈구미베어 살인사건〉을 썼다. 그리고는 덜컥 이 작품이 표제작의 자리를 꿰찼다. 이것도 다 인연이려니.
뭐가 됐든 곰 인형이나 그 비슷한 게 나오는 거로 한 편 써야지 싶다가 고른 소재가 구미베어였다. 언제나 구미베어같이 귀엽고 앙증맞은 음식들이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입안에 넣고 잘근잘근 씹을 것이면서 저렇게까지 귀엽게 만들다니. 가학성마저 느껴지는 디자인이지 않은가.
이 의문은 결국 구미베어처럼 잘린 사람의 시체 이야기를 쓰자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 결론은 도대체 왜 구미베어처럼 시체를 잘라놓는가, 또 그렇다면 그 살인 도구는 무엇인가라는 다음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대답하기 힘든 질문에는 농담으로 도피하는 버릇이 도져 이런 내용의 글을 쓰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이 소설 같은 분위기가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자아도취형 연쇄살인마 이야기는 정말이지 질색이지만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나 타카하시 요우스케의 〈공포학교〉 그리고 영화 〈아담스 패밀리〉처럼 코믹한 호러물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무서운 것, 두려운 것, 외경스러운 것으로 치부되는 요소들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전락시키는 일은 내게 있어 무척 중요한 테마다.
〈구미베어 살인사건〉은 완전히 엉터리에 허무맹랑한 글이다. 내가 사랑하는 수많은 작가님과 관계자들을 배신하는 말이지만 나는 그분들이 ‘SF를 공상과학으로 번역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전에 이미 공상과학이라는 개념에 오염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런 글을 쓰는 데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다. 무엇보다 내 계보는 일본 SF의 ‘스코시 후시기’에 가깝기도 하고 말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일본 책들이 잘 팔리니까 가짜로 일본식 필명을 만들어서 일본 작가인 척을 하고 일본 등장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쓰겠어!”라고 헛소리를 하고 다녔다. 필명도 이미 정했다. ‘우소다 소우’라고. ‘무라카미 하루히’나 ‘스즈미야 하루키’ 등의 필명도 고민해봤지만, 혹시나 누가 진짜로 착각할까 봐 일부러 엉터리나 다름없는 이름을 지었다. 어디선가 우소다 소우와 마주치시면 얘 또 이러는구나 하고 웃어넘겨 주시길.
이 작품은 〈도깨비 시장에서 만나요〉라고 기존에 준비 중이었던 시리즈의 ‘수입과자점 편’이기도 하다. 도깨비 시장이 그 도깨비 시장이 아니라 이 도깨비 시장이라는 내용의 세계관이다. 작중에 언급된 사건 몇 가지는 심심하면 써볼 계획이다. 아마 dcdc보다는 우소다 소우가 쓰겠지 싶다.
〈월간영웅홍양전〉
변명을 하자면 2015년에 쓴 작품이다. 이 원고를 단편집에 담아도 좋을까 한참을 고민했다. 글을 쓴 당시에 주변의 여성 작가와 여성 독자들 예닐곱 분에게 모니터링을 요청했고 그분들의 답변은 제법 긍정적이었다. 출간 이후의 평가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사람들의 반응을 끌고 오는 것 자체가 변명으로써는 아주 수준 미달이다. 내 고민과 방식이 잘못된 것이 분명한 상황에 타인들의 반응을 끌어와야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런데도 책에 수록하기로 한 것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소재의 선점을 위해서다. 내가 한 번 더 나의 낮은 수준을 자백하는 대신 누군가가 이 소재를 악의적으로 활용하는 상황을 확실히 차단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더 나은 방식으로 쓰는 사람에게는 애초에 비판의 여지가 없으니 내가 선점을 했든 아니든 상관이 없을 터이고.
다른 이유는 장 회장이라는 캐릭터에 대한 비판은 유효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출산율의 감소로 장난감이 팔리지 않게 될 것이라는 위협을 느낀 장난감 회사 사장이 ‘슈퍼빌런’이 되어서 전국의 가임기 여성을 임신시키는 전파를 쏘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내용은 남겨놓아야 하지 싶었다.
아마 이를 착각하는 독자는 없겠지만 1인칭 화자는 작가의 대변인이 아니다. 경각은 의도적으로 나 이상으로 멍청하게 설정된 인물이다. 그리고 이를 착각하는 독자 역시 없겠지만 1인칭 화자는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화자가 아니다. 경각은 꾸준하게 거짓말을 하는 인물이다. 감상에 있어 부디 이 두 지점을 고려해주셨으면 한다.
감사한 추억도 있는 작품이다. 어릴 시절부터 존경해 마지않던 구자형 성우님께서 팟캐스트 ‘북텔러리스트’를 통해 이 소설을 낭독을 해주신 것이다. 이를 인연으로 구자형 성우님 및 북텔러리스트 여러분들과 몇 번의 교류를 가진 바 있다. 오랜 팬으로서 이보다 감격스러운 일은 없다.
당연히 계산속도 들어간 작품이다. 슈퍼히어로 물에 대한 수요는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 확실하니 기획을 잘 짜야만 했다. 그렇기에 독립영화로도 찍을 수 있을 정도의 구성을 고민하고 썼다. 슈퍼히어로의 능력도 CG 비용을 아낄 수 있도록 괴력으로 설정했다. 핵심 등장인물도 셋으로 국한했으며 영화로 만들 수 있을 분량의 이야기를 단편 하나에 담기 위해 과거 회상으로 내용을 압축시켰다. 소설과 동일하게 진행하면 드라마 한 편, 과거 회상이 아닌 시간순으로 사건을 진행하면 영화 한 편 분량이 나온다.
비판을 듣지 않기 위해서 아예 여성의 이야기를 하 않는 선택지를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실패하더라도 여성의 서사를 계속해서 담고 실패하면 실패하는 대로 욕을 먹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를 듣고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 부끄럽고 부끄러울 일이다.
〈구자형 바이러스〉
구자형 성우님이 〈월간영웅홍양전〉을 낭독해주신 이후 성우님을 몇 번 직접 뵐 기회가 있었다. 덕분에 성우업계 내부의 이런저런 재미난 일화도 많이 들었고, 10대 시절부터 간직한 팬심을 채우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 참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배우나 감독은 다 이 작품이 자기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반면, 성우들은 그런 경우가 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에게 있어서는 〈카우보이 비밥〉의 스파이크는 구자형 성우님 버전 하나뿐이다. 하지만 이 문제는 내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다짐했다. 없는 솜씨로나마 구자형 성우님에게 헌정작을 하나 써서 바치겠노라고. 그리고 그 헌정작은 구자형이 아닌 그 누구도 연기할 수 없는 내용이 될 것이라고. 〈구자형 바이러스〉는 그렇게 나온 글이다.
나는 나 자신을 SF 작가로 규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약한 편이다. 지망생 기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대신 나는 팬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 이는 내게 있어 단점이기도 장점이기도 한데, 이 작품에 한정해서는 장점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예술적 완성도와는 다른 잣대가 적용될 작품이기도 하고 말이다. 조금 더 많은 작품의 많은 배역 이야기를 하지 못한 것만이 아쉬울 따름이다.
이 작품은 구자형 성우님에 대한 헌정작인만큼 구자형 성우님이 어떻게 쓰셔도 자유다. 애초에 헌정작의 권리를 내가 독점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니 말이다. 출판사에도 단편집 계약에 앞서 이에 대한 양해를 구했다. 돈 없이 가난한 내가 할 수 있는 팬질로는 이 방향이 최선이지 싶다.
나의 출신이 출신인지라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낭독을 전제로 하고 쓴 글이다. 유튜브에서 구자형 성우님과 북텔러리스트 여러분이 낭독한 영상을 찾을 수 있다. 구자형 성우님의 폭넓은 연기력을 감상할 수 있다. 한 번은 무대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 구자형 성우님이 이 영상을 공개하시고 싶다 하신 적이 있으니 곧 공연 파일도 찾아볼 수 있을지 모른다.
글을 쓰며 가장 즐거운 때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데뷔작인 〈무안만용 가르바니온〉도 그랬지만 〈구자형 바이러스〉 역시 무게중심이 서사밖에 놓여 있고 작품 외적인 현실이 작품 내의 인물들에게 간섭한다. 앞으로도 이런 장난을 자주 쳐보고 싶다.
〈구자형 바이러스〉가 구자형 성우님에게 바치는 헌정작이라고 밝히기는 했지만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서브컬쳐 동지들에게 바치는 글이기도 하다. 2년 정도 소재를 더 묵혔다면 훨씬 나은 글이 나왔겠으나 동지들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구자형 성우님이 구자형 성우님의 이야기를 낭독하는 이벤트는 가급적 이르면 이를수록 좋겠다고 판단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쓰게 되었다. 90년대 컨텐츠에 대한 추억회상은 20년대까지 끌고 가선 안 되지 싶다. 애초에 내겐 시대를 초월하는 명작을 쓸 능력이 없으니, 이런 이벤트를 기획하는 쪽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의 청춘개론〉
나의 뿌리에는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도 있다. 어릴 적부터 언젠가는 〈셜록 홈즈〉 시리즈를 고스란히 베낀 표절작품을 만들겠노라고 다짐했는데, 그 다짐이 이런 결과물로 이어졌다. 다 쓰고 난 뒤에야 선홍지는 셜록 홈즈보다는 모리어티 교수의 포지션이었다는 것을 깨달아버렸기는 해도 이 단편 자체는 만족하고 있다.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의 청춘개론〉의 골조는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장편 〈선홍빛 연구〉에서 따왔다. 그 외에도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모티브를 얻은 장면들이 많다. 알아봐 주신다면 무척 기쁠 것 같다. 정작 글을 쓴 나부터가 각 장면들이 어디서 따온 것인지 가물가물하지만 말이다.
이 작품은 거의 모든 요소가 〈셜록 홈즈〉 시리즈 영향 하에 있지만 의도적으로 배제한 부분도 있다. 정오손이 존 왓슨처럼 사건을 묘사하는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존 왓슨은 화자로 결코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다. 이렇게 화자를 신뢰할 수 없게 되면 극중극을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에 층위가 생겨 메타적인 독해가 강제된다. 하지만 정오손에게 그 귀한 자리를 맡기지는 못했다.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의 청춘개론〉에는 깊이가 없길 원했기 때문이다.
비인가하교자문위원이라는 직업을 떠올린 계기는 과거 잠깐 맡았던 아르바이트가 너무 따분해서 한시라도 빨리 집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회사만이 아니라 학교도 참 재미없는 공간이니 이런 내용도 있음직하다 싶어서 써보았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교사와 학교에 대해 불필요한 환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환상은 교사와 학생 상호간 불화만 키울 뿐이라고도 생각한다.
이 글은 당연히 시리즈를 목표로 쓴 글이기도 하다. 일단은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와 네 개의 공인인증서〉와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와 배수고 미친개〉 그리고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와 소환사의 협곡〉 정도를 예정하고 있다. 어차피 변덕으로 쓰는 글인 만큼 제목과 내용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공인인증서는 가급적 빨리 잊혀 내 소설의 소재가 되지 않았으면 싶기도 하다.
탐정소설은 대부분 좋아하지만 기왕이면 살인사건이 없는 탐정소설을 좀 더 선호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에서 좋아하는 작품들 역시 〈보헤미안 스캔들〉이나 〈입술 뒤틀린 사나이〉
또 〈푸른 카방클〉처럼 재치로 가득한 단편들이다. 〈비인가하교자문위원 선홍지와 청춘개론〉 역시 〈셜록 홈즈〉 시리즈를 패러디하면서 소소한 일상을 담는 것이 목표였다.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 같은 학술적 개념이 추리 장르에서 부정확하고 무분별하게 오남용된 나머지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도 XXX패스라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원작의 셜록 홈즈는 괴짜 이상의 몰상식한 인물이 아님에도 말이다. 부디 무례함과 불손함이 강함의 증거로 여겨지는 이런 유행이 하루라도 빨리 사라지길 빈다. 선홍지도 그 유행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하고자 한다.
〈버려진 곰인형들을 위한 만가〉
거리에 널린 쓰레기들 무엇이든 사연 하나 없겠느냐만 버려진 곰 인형이 주는 처연함은 남다르다. 귀여운 인형이 험한 곳에 있어서인지 더 안쓰럽다. 더욱이 많은 경우 곰 인형은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는 경우가 많으니 그런데도 버려졌을 때의 드라마를 상상하게 된다. 이 처연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버려진 곰 인형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쓰자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이 소재는 내가 다루기에는 너무나 강하다는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작가인 나만이 아니라 독자들도 거리를 두고 보도록 강제할 장치를 넣어야만 했다. 고민 끝에 〈뱀파이어에 관한 아주 특별한 다큐멘터리〉나 〈모던 패밀리〉 그리고 〈팍스 앤 레크레이션〉 등의 모큐멘터리 코미디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다음으로는 이런 소재로 소설을 쓸 것이라고 광고하고 다녔다. 한 3년 정도는 광고했던 것 같다. 작품에 들어갈 대부분의 사건들을 제목을 떠올리고 한 달 안에 구상하기는 했지만 바로 집필을 시작하지는 못했다. 구상 단계에서 이미 등장인물 중 하나를 죽였기에,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죽은 누군가를 애도할 기간을 거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정작 집필에는 3일 조금 넘게 걸렸다.
초기에 구상했던 글은 더욱더 노골적이고 잔인한 장면들로 가득했다. 독립영화 감독이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곰 인형들과 함께 생활하는 이야기가 될 예정이었고 그에 따른 반전도 준비했지만 이렇게 쓸 경우 애써 만든 거리감이 무너진다는 판단을 내리고 곰 인형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묘사로 독자들의 감정을 강제하는 것은 상도덕에 어긋나는 일이니까.
이 작품을 구상한 뒤 ‘나는 〈버려진 곰 인형들을 위한 만가〉가 표제작이 될 단편집을 쓸 거야. 그리고 단편집이 한 주제로 묶일 수 있도록 몇 년 동안 내가 쓰는 단편에는 모두 곰 인형을 넣어야지.’라고 결심을 했다. 다음에 나올 단편집은 책이 무척 예뻤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는데, 아무리 표지를 못 만드는 출판사들이 많더라도 곰 인형만 하나 그려 넣으면 되는 표지조차 못 만드는 출판사는 없을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산속도 헛되게 애초에 표지를 잘 만드는 아작 출판사에서 단편집이 나오게 되었다. 더욱이 표제작도
〈구미베어 살인사건〉으로 바뀌었다. 비록 표제작은 아닐지라도 이 단편집에서 중심을 잡는 작품은 이 〈버려진 곰 인형들을 위한 만가〉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나는 항상 소설을 완성한 뒤 그 결말이 어찌 내려졌든 등장인물들이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후일담을 상상하고는 한다. 그러므로 내 소설은 모두 해피엔딩이라고 봐도 좋다. 왜냐하면, 작가인 내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후일담을 상상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훌륭한 해피엔딩이라 자부한다.
〈손인불리심청전〉
‘〈심청전〉 그거 완전 러브크래프트풍 코스믹 호러 아니냐?’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쓴 글이다. 내가 처음 떠올린 줄 알았는데 검색해보니 그렇지는 않았다. 아쉽지만 〈아기공룡 둘리〉 코스믹 호러 가설은 내가 세계최초로 제시했다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농담이 아니라 〈아기공룡 둘리〉는 외계의 초월적인 존재로부터 비상한 능력을 이식받은 고대의 생명체(둘리)가 빙하 속에 갇혔다가 현대 사회에 깨어나 그와 마주친 인간(고길동)을 파멸로 몰고 간다는 점에서 코스믹 호러의 훌륭한 모범이라 할 수 있다.
김수정 작가님의 영구히 불멸할 걸작에 대한 비평은 이쯤하고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 작품은 〈심청전〉을 코스믹 호러로 재구현하는 것 외에는 내가 즐길 요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평소 쓰지 않던 형태의 문체를 실험하는 도구로 삼았다. 나는 당시 경성을 무대로 한 장편을 기획하는 중이었는데, 어떻게 분위기를 잡아보려고 하니 판소리에서나 쓸법한 어휘들을 배울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실험의 결과는 절반 짜리 성공이라 본다. 앞으로 글을 쓰면서 이런 문체가 필요한 상황들이 있기는 하겠으나 문장이 무거워지니 쓰기도 읽기도 모두 피곤해서 전체적인 분량을 줄여야만 했다. 내가 쓴 문장이 적절한지 판단할 수도 없어 내게 맞는 작업방식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 경성을 무대로 한 장편의 기획도 지금은 폐기처분한 상태다.
제목은 손인불리기(損人不利己)에서 살짝 고쳐 만들었다.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입히면 자신에게도 이롭지 않다는 뜻이다. 어렸을 적 재밌게 봤던 무협지 〈절대쌍교〉의 등장세력 십대악인 중 백개심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이 인물의 별호가 손인불리기였다. 당시 나는 불리기가 우리말이라 착각을 해서 손해 보는 사람을 늘린다는 말로 이해를 했었다. 나중에야 모든 단어가 한자였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써먹게 되었다.
〈심청전〉을 코스믹 호러풍으로 변주했다고 하기는 했으나 원전부터가 여성에 대한 착취가 바탕에 깔려있어 크게 바꾼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다만 몇 가지 우려로 심학규를 맹인이 아님에도 맹인 행세를 하고 다니는 사람으로 설정하는 정도의 변화를 주었다.
〈손인불리심청전〉은 이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곰 인형이나 그 비슷한 물건이 직접적으로 언급이 되지 않는 작품이다. 애초에 단편집에 넣을 요량으로 쓴 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심청이가 곰을 때려잡는 장면이라도 넣을까 고민했으나 그냥 화주승이 들고 다니는 상자의 가죽 일부가 곰의 가죽이었다고 사후적인 설정을 덧붙이는 정도로 타협을 볼까 한다.
〈곰인형이 왔다〉
이마 이치코의 만화 〈백귀야행〉에 인상 깊은 설정이 하나 있다. 주인공들은 모두 요괴를 볼 수 있는데, 동일한 요괴를 보더라도 각자 다른 형태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 설정은 에피소드마다 유지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진짜로 물리적인 신체가 없는 유령이나 요괴가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이야기이지 싶다.
하기야 물리적인 신체가 있더라도 보는 사람마다 달리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내 눈에 예쁜 사람은 뭘 해도 예쁘고 내 눈에 미운 사람은 뭘 해도 밉다. 이런 개인적인 감정 외에도 그날의 습도, 공간의 조명, 피로도, 수면 시간, 식사량, 지하철에서 내리기 전에 타는 사람과 부딪힌 횟수 등 온갖 다양한 요소들이 나의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나는 되도록 나 자신이 건강한 상태로 있도록 노력한다. 내가 피곤하면 나도 세상을 피곤하게 만든다. 나를 피곤하게 만든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정당방위가 성립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몹시도 피곤한 상황에는 공격할 대상을 잘못 고르기 마련이라 그 전에 알아서 조심하는 편을 선호한다. 사람이 아무래도 받은 만큼 주고 준 만큼 받기 마련이니 무엇을 받고 무엇을 줄지 고민하고 살고 싶다.
친구가 해준 이야기 중에 이제는 내 입버릇이 된 말이 있다. “취향이 팔자다.”라는 명언이다. 나는 오랜 세월 수학 포기자로 살아왔지만, 대수의 법칙 정도는 이해하고 있다. 취향이 반복되면 경향이 된다. 그리고 경향이 반복되면 방향이 된다. 취향은 그렇게 팔자가 된다. 나는 피곤하게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한 더 건강하고 안전한 취향을 가꾸려고 한다.
물론 취향이라는 게 쉽게 바뀔 무엇이 아니기는 하다. 다만 내가 왜 망하고 있는지를 미리 알고 있으면 내 무덤을 내가 파더라도 좀 더 안심하게 되지 않던가. 내가 파는 게 무덤인지 알고 파면 최소한 주변 사람들은 대피시키고 완전히 망하기는 전에 미리 할 일들을 정돈해놓기도 가능하다.
결국, 이 모든 것은 행복해지기 위한 발버둥이다. 이런 노력이 성공적인 결과로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간단히 행복해질 수 있었다면 발버둥이라는 표현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미 눈치를 챘겠지만 계속해서 소설과 상관없는 헛소리를 하며 말을 돌렸다.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아무 이야기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가 있는 글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