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내셔널의 밤
나이, 성별, 지역……
우리는 “주민등록에서 도망칠 수 있을까”
“일단 어디든 다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처럼.”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은 박솔뫼 작가의 여덟 번째 작품집 『인터내셔널의 밤』이 아르테에서 출간되었다. 부산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만난 한솔과 나미 두 여행자의 이야기를 담은 『인터내셔널의 밤』은 심드렁하게 읊조리는 혼잣말들이 의미를 내포하고 소설의 형상을 갖추며 그리하여 깊이 숨겨져 있다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다각적으로 단서를 드러내고 마는 박솔뫼 소설만의 매력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자신을 옥죄던 교단에서, 현실에서, 성역할에서 도망쳐 나온 이들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 벗어나려 하기보다는 좀 더 자신의 근본에, 정체에 다가가려 애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솔은 자꾸 배제되고 밀려나는 세상에서 숨으려 하기보다는 눈에 띄고 싶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며 사회적 사람이, 인구의 일부가 되는 일을 견디려고 노력한다. 나미는 언제나 더 나은 자, 다른 차원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자신을 구원하는 목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듣게 된다. “시간은 길고 시간은 많고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을 거야. 그냥 살면 된다”는 유미 이모의 말은 도망쳐 나온 세상을 등지고 새로운 관문 앞으로 발을 떼볼 용기를 갖게 해준다.
항구와 커다란 여객선 사진을 함께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제 각자의 새로운 여행지로 다시 떠나려 한다. 두려움을 딛고 하나의 새로운 관문을 통과하면서 한솔은 가뿐한 발걸음과 함께 센티멘털을 느끼며 수첩에 한 문장을 남긴다. “모든 것이 좋았다”고.
*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는 소설을 읽는 삶은 그렇지 않은 삶과 어떻게 다른지, 소설이 어떻게 삶을 자극하는지 고민합니다. 인간성을 탐구하고 인간성을 지키는 것이 소설의 본질이라면, 지금 우리 시대에 맞는 소설을 찾아 더 많은 독자와 나누려 합니다. 가볍게 지니지만 무겁게 나누며 오래 기억될 ‘작은책’ 시리즈에 담긴 소설은 e-북과 함께 오디오북으로도 제공될 예정입니다.
“당신은 보편시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되돌아가세요”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향해도
당신은 열 시간을 이틀을 사흘을 기차에서 보낼 수는 없다.
사람들은 내리고 당신은 어디론가 가야 한다.”_ p. 9
우리는 몇 시간만 달려도 길이 끝나고 마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다. 고유한 이름과 고유한 번호를 부여받았으며, 한 도시의 ‘시민’으로서 살아간다. 보편시민으로서 사회가 마련한 여러 장치들을 특별한 두려움 없이 통과해 나간다. 한편, 어떤 관문 앞에서 단순해 보이는 질문에도 쉽게 답하기 어렵고 자신을 증명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작고 큰 관문들, 지역 관공서에서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일에서부터 국경을 넘나드는 일, 혹은 어떤 관계와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나가는 일까지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태어난 이후 줄곧 우리는 이 사회 안에서 규정되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자신의 세계에서 인정받지 못한 한솔과 나미는 각자의 자리에서 떠나 “신기하고 무섭고 이상한 기분”의 심리 상태에서 기차의 옆자리 사람으로 마주하게 된다. 왜 혼자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 몇 살인지, 이름이 무엇인지 말해주어도 잘 기억할 수 없는 ‘관계없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는 가운데 이들은 서로의 불안을 감지한다. 불안했기 때문에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게 된다. 마치 벽 앞에 선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관문을 통과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생각 하던 두 사람은 알 수 없는 끌림에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게 되면서 다시 세상으로 조금씩 나아가게 된다.
한솔과 나미가 만나듯 우리는 작은 대한민국 안에서도 같고 또 다른 사람들을 언제나 새롭게 만날 수 있다. 다른 조건 다른 상황을 가진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남들과 다른 나를 이해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보편시민의 둘레가 조금 더 넓게 그려져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혼자 서 있는 사람이 아니야”
“우리는 어른이 되고 뭔가 빼먹은 얼굴이 돼서 만난다.
그건 못 보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게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사람과 만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사람으로 다음 장면 같은 장소에서 만나는 것이겠지.”_ p. 26
한솔에게는 “인생에서 무언가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멀리 일본에 가 있는 친구에게서 청첩장을 받고 갈 수 없을 것 같아 거절하려 하지만, 조금씩 변해갈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지금의 자신과, 이십 년 전 친구의 결혼식에 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중년이 된 자신을 상상하며 결국 참석하기로 마음먹는다. 한 사람이 내리는 하나의 결정에도 이렇게 여러 자신의 모습이 겹쳐져 있다. 한 사람이지만, 십 대의 한솔과 이십 대의 한솔이 겹쳐 있고, 매일매일의 한솔들이 모두 포개져 홍한솔이라는 한 인물이 되었다는 작가의 존재론적 성찰을 따라가는 일은 이 작품이 품고 있는 또 하나의 재미이다.
한편 나미는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던 곳에서 도망쳐 나온 뒤 쫓기는 불안 속에 괴로워하며 그동안 아끼며 보살피던 아이들을 두고 나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 것 때문에 가슴 아파한다. 커서, 다 자란 후에 다시 만나면 되지 않느냐는 한솔의 질문에 나미는 지금의 모습은 다시 볼 수 없는 모습이라고 단언한다. 한 사람을 좋아하고 알아봐주는 일은 여러 모습을 모두 지켜봐주는 일이 아닐까. 여기서 작가의 성찰은 조금 더 깊어진다.
자신을 증명할 수 없는 곳에서 도망치듯 떠나온 두 사람은 여행 중에 그동안 살며 거쳐온 자신의 모습들을 떠올려본다. 또한 지금은 혼자 있지만 도움을 주려는 사람들, 자기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을 떠올리며 자신의 두터운 존재감을 인식하게 된다. 오는 길을 상세하게 알려주는 친구의 메시지를 읽으며 한솔이 자신도 모르게 “나는 내가 혼자 서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혼자 서 있을 때가 있지만”이라는 말을 내뱉게 되는 장면에 이르러 독자들은 소설을 따라가며 느끼던 불안감에서 벗어나 안도하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이제 부산을 떠나 다른 곳으로 향해야 하는 한솔은 호텔방에서 창밖을 내다본다. 불을 반짝이는 야경이 보이다 눈에 힘을 풀면 또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한눈에 보이는 두 가지 모습을 보며 한솔은 자신과 자신이 살아갈 세계가 한 장면에 겹쳐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 장면은 단연 소설 속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손꼽을 만하다.
◎ 본문 소개
하지만 점점 빨라지는 것에 맞춰 사람들은 계속 옮겨질 것이다. 그게 주요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라면 중요한 것을 잃은 사람인 채로 길 위를 지나가고 기차가 멈춘 곳에 도착할 것이다. [……] 그런 식으로 뭔가를 잃은 사람으로 길 위에 자신의 중요한 것들을 흘려버린 존재로 살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이 잘 주우면 되지 않을까. (p. 11)
인생에서 무언가 사건이 있었고 그 이후, 이전의 삶을 회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편시민에서 박탈당했는지 또한 배제라는 말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야 서류에 필요한 도장을 받을 수 있었다. (p. 55)
책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사라지고 지나간다. 어떤 함께하던 책들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게 되는데 그걸 슬퍼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어떤 것들은 이미 변해버려 흔적이 없어졌을 수도 있다. 그래도 헤어짐은 있다. 한솔은 열여섯 열일곱에 읽던 책들을 지나가며 아 이미 헤어졌군 우리는 헤어지고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p. 89)
나는 혼자 서 있고 가끔 벼랑 끝에 서 있고 지금도 혼자 있다. 외롭거나 고독한 것, 처참하고 우울한 것과 무관하게 모든 개인처럼 혼자 서 있다. (pp. 91~92)
어디든 일단 다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처럼.
그게 나미의 리추얼이 될 것이다. (p. 103)
귀에 들리는 외국어를 음악처럼 들으며 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했다. 손에 든 수첩에 방금 떠오른 말을 썼다. ‘모든 것이 좋았다’고. (p. 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