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그린 사람
《있지만 없는 아이들》《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쓰기의 말들》
감응의 작가 은유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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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듣고 쓰는 사람
은유가 경청한 18인의 목소리
《다가오는 말들》《쓰기의 말들》《글쓰기의 최전선》 등을 통해 따뜻하지만 날카로운 글을 쓰는 탁월한 에세이스트이자, 《있지만 없는 아이들》《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등을 통해 섬세한 르포르타주 작가로서 책마다 독자들의 찬사를 받아온 은유. 그가 작가의 덕목으로 ‘듣는 신체’를 각인하고, 이를 신뢰와 공감의 서사로 풀어내는 겸손한 인터뷰어가 되어 다시 돌아왔다.
이 책은 2020년 1월부터 2021년 3월에 걸쳐 〈한겨레〉에 연재된 ‘은유의 연결’에서 만난 16인에 다른 매체에서 함께한 2인을 더해 새롭게 엮은 인터뷰집이다. 공교롭게도 비대면이 일상화되고 불안이 증폭되는 팬데믹 시대에 행해진 이 인터뷰들은 그래서 더욱 간절한 ‘연결’의 장이 되었다. 작가가 기꺼이 가닿고자 했던 인물의 이야기는 결코 개인의 서사로 그치지 않는다. 혼란한 현실인 지금 이곳을 톺아보고 과거를 제대로 마주하되 올곧은 미래를 무한히 상상하는 연대의 기록으로 확장되었다.
인권기록활동가, 의사, 소설가, 시인, 만화가, 가수, 정치인, 경찰, 아나운서, 기업인 등 정치, 사회, 문화, 예술 분야 다양한 시야를 가진 인터뷰이의 이야기들은 이해와 공감의 전달자 은유의 몸을 통과해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삶의 위기와 고통에 쪼그라들지 않고 크게 살아가는 이의 이야기
작가는 이야기의 견고한 힘을 믿는다. 내가 듣는 이야기가 곧 나의 사고와 행동방식을 바꿔 나의 토대를 형성한다는 사실을 설파한다. “살아가면서 참조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아야, 삶에 대한 질문을 비축해두어야 내가 덜 불행하고 남을 덜 괴롭히게 된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가 독자에게 ‘연결’한 인터뷰이 18명은 “자기에게 찾아온 느낌들, 생각들, 마음들을 흘려보내지 않고 마치 재물을 지키듯이 지켜내고 사는 사람들”(300쪽)이다.
1부에서는 누구나 가는 길을 마다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름으로써 진정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하는 이들을 묶었다. 사범대를 다니며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홍은전은 남을 물리쳐야 꿈을 이루는 제도 교육의 경쟁 트랙을 벗어나 노들장애인야학에 들어감으로써 ‘아무도 이기지 않고’ 교사가 되었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인권기록활동가로 산다. 조기현은 스무 살에, 덜컥 병이 든 아버지를 외면하지 않고 돌봄을 사회적 의제로 만드는 투쟁을 시작한다. 원도는 경찰로서 자신이 목도한 ‘민생’을 낱낱이 기록한다.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증인이자 측은지심으로 이타적인 삶을 살아온 자연인 씨돌 김용현, 기다리고 선택받는 직업의 틀을 벗어나 하고 싶은 것을 시도하고 실천하며 아나운서의 외연을 확장한 임현주, 자식을 잃고 비정규직 청년들이 일하다가 죽는 현실에 눈뜨며 말하는 주체로 거듭난 고 김용균의 엄마 김미숙이 그들이다.
2부에서는 사람이라는 존재의 힘을 믿고 긍정하며 나아가는 이들을 엮었다. 코로나로 노래하는 무대가 사라지자 직접 관객을 찾아 나선 가수 시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내는 일에 진심을 다하는 소설가 김중미, 인간의 정신세계를 보호하고 탐구하는 국립정신건강센터장 이영문, 소설을 읽으면 더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것 같다는 소설가 김혜진, 기후위기 시대 대체육 개발 사업을 이끄는 기업인 민금채, 가난한 사람들의 옹호자로서 ‘무상의료’를 앞장서 지지하는 의사 신영전이 그렇다.
3부에서는 나의 힘으로 타인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 자존가들을 모았다. 스물여섯에 해고자가 된 김진숙은 노동자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복직투쟁을 37년간 이어간다. 담백한 외유내강 만화로 가부장제에 균열을 내는 만화가 수신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척박한 인식과 싸워가는 한국성폭력상담소장 김혜정, 법과 제도를 바꾸어 더 나은 세상을 설계하는 비선출직 정치인 박선민, 혈육은 잃었지만 다시는 산업재해가 생기지 않는 사회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고 김태규의 누나 김도현, 소수자의 평범한 일상을 시로 엮어내는 시인 김현이 그들이다.
은유는 “인간다움의 가치를 질문하며 크게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사람이 본디 가지고 태어난 고유의 기품을 호명한다.
나는 이런 사람을 크게 그리고 싶었다. 모두가 쳐다보는 아름다운 사람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이 무엇인지 사유를 자극하는 사람들.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살아가는 일 자체로 모두의 해방에 기여하는 사람들.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는 힘이 세서 견고한 관념을 부순다. 내가 듣는 이야기는 내 감각과 정신의 속성을 천천히 바꾼다. 살아가면서 참조할 수 있는 사람 이야기가 많아야, 삶에 대한 질문을 비축해두어야 내가 덜 불행하고 남을 덜 괴롭히게 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했다. 지배는 단절과 분열의 문화 속에서 가장 잘 기능한다는 말이 있듯이 ‘연결’은 억압을 벗어나고 해방에 이르는 시작이자 원리다.
여기 살아 숨 쉬는 사람의 이야기가 독자들의 세계로 어서 편입되었으면 한다. 삶의 위기와 고통에 쪼그라들지 않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질문하며 크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갖고 태어난 고귀함의 유전자를 깨어나게 할 것이다. _‘책머리에’에서
인터뷰라는 사랑의 능력
은유 식 실천하는 인문학
“출근 시간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탑승 투쟁을 벌이던 장애인들이 이번에는 휠체어에서 내려와 바닥을 기어 지하철을 탔다. 참담함은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이 처절함을 극대화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동료 시민이 존엄을 위해 저렇게 할 때까지 무엇을 했느냐는 반성에서 나오는 참담함이다.”(엄기호) 2022년 5월 3일 서울시장애인자립생활센터협의회 회장이 ‘참담하게도’ 지하철에 탑승했다. 그리고 이틀 뒤인 5월 5일 은유 작가는 국회 앞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동조단식에 참여했다.
인터뷰로 만난 “귀인”들을 통해 “장애, 의료, 돌봄, 여성, 노동, 정치, 환경 등 삶의 다양한 분야를 공부”(9쪽)했다는 그는 애써 배운 것들을 일상 안에서 힘껏 실천하고 전파하고 있다. “기록하는 사람, 반성하는 사람”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크게 그린 사람》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던 것도 그러한 연유일 것이다.
전선에 서긴 했는데 확 불태워지질 않았다. 내 싸움이어서였을까. 큰 싸움들이 도처인데 한 사람의 복직이라는 작은 싸움이어서였을까. 자꾸 쭈뼛거리던 와중에 인터뷰가 이루어지고 울고 웃으며 폭포처럼 생애를 쏟아내고 그걸 글로 보니, 아, 이건 꼭 해야 하는 싸움이구나 하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복직투쟁의 전선이 제대로 쳐진 건 이 인터뷰 기사가 나가고 나서다. 그리고 나는 2022년 2월 25일 마침내 37년 만의 복직을 이루어냈다. 은유 작가의 힘이 컸다._219쪽에서
“이 시대의 인물 화첩이자 나만의 인생 수업 노트이고 인간학 교재”인 《크게 그린 사람》으로 작가는 다시 예의 ‘사랑의 능력’을 세상으로 부지런히 타전 중이다. 인터뷰는 결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