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R
“누구에게 해명하고 싶진 않아. 내 삶은, 오직 나의 예술이야.”
삶에 새겨져온 권태와 회의를 무릅쓰고
찬란하게 펼쳐 보이는 사랑과 이해의 기록
등단으로부터 27년에 이르는 내내 위선과 가식을 배격하고, 여성의 내면에 억압된 감정을 탐구해온 작가 전경린의 새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일찍이 ‘정념’의 작가로 불려온 전경린은 정해진 규범을 위반하는 욕망과 자유로운 생의 가능성을 개진해왔다. 한국일보문학상, 문학동네소설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숱한 수상 이력은 한국문학사의 특별한 고유명이 되어온 전경린의 궤적을 증명한다. 전경린의 다섯번째 소설집 『굿바이 R』은 전경린을 읽어온 독자에게는 통념을 거부하는 것으로 인식의 경계를 한번 더 밀고나가는 서늘한 감수성을, 전경린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인간의 근본을 통찰하는 원숙한 시선과, 인생을 닮아 단단하고 굳센 문장들을 체험할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전경린의 소설은 염증과 권태로 가득한 현대인들이 속으로만 내질러왔던 비명에 언어를 부여했다. 특히 지금 이것이 과연 최선의 삶인지, 다른 삶이 가능하지는 않았는지 수시로 떠오르는 의문을 삭여야 했던 여성들에겐 현실을 구원하는 상상을 가능케 했다. 『굿바이 R』은 육박하는 삶을 있는 그대로 긍정해내는 마법 같은 전환으로 가득하다. 한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되는 자유의 여정을 펼쳐 보이기에 가능한 경지이리라. 이제 전경린의 인물들은 사람이 상상만으로는, 혼자 훌쩍 떠나는 일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굿바이 R』은 필연적인 고독의 되새김질 끝에 우리가 어떻게 타인에게 가닿고 마침내 사랑할 수 있는지 겪어낸 기록이기도 하다.
『굿바이 R』에는 치열했던 사랑이 저문 뒤의 풍경들이 있다. 하나의 변곡점을 지난다고 일생이 마무리되지는 않기에 미지근하게 찰랑거리는 관계가 지속된다. 대부분 이혼했거나 가족을 떠나보내고 혼자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에게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지만, 그들의 감정은 두근거림이나 설렘과는 거리가 있다. 「승객」의 순례는 연인인 석우와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의견차 때문에 만남을 계속해도 될지 고민하고 있다. “그저 지극히 현실적으로 생활을 같이하고 싶”을 뿐이지만, 그녀가 만나온 이들은 가벼운 만남을 원하거나 같이 나누기 어려운 치명적인 습관을 지닌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순례는 그들과 함께 지낸 시간으로부터 점차 의존이 아닌, 삶을 향한 곧은 의지를 길어낸다. 소설가 함정임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순간이나 사태에 대한 특유의 날카로운 어휘와 문장들은 소설 미학의 한 경지를 보여준다. 근사하다. 작은 이야기로 단숨에 거대한 우주의 조홧속을 꿰뚫어 보여주는 서사 예술 자체”라고 평하기도 했다.(『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 열림원, 2022)
오랜 헌신과 갑작스러운 배반, 어린 시절의 학대와 뒤늦은 참회 사이에서 비로소 이해에 이르는 이들도 있다. 「붓꽃」은 오랜만의 동창생 모임에서 친구의 남편이 구조조정된 뒤에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것으로 시작된다. 승승장구해온 친구는 애써 감춰온 “살아남은 기분”을 고백하고, 어른들을 모시느라 스트레스로 청력 상실과 이명을 겪은 친구는 그들의 “마지막 사랑”을 떠올린다. 「합」에선 자식들이 독립한 뒤 혼자 남은 집안에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존재가 찾아온다. 딸이고 아들이자, 부모이며, 자매, 전남편, 애인들의 모습을 갖춘 ‘합’은 혼자만으로도 버거운 소연을 가혹하게 부려먹는다. 한편 그로 인해 가까운 이들과 더욱 거세게 부딪치는 과정이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곧 자신을 이해하는 정도(正道)에 가깝다는 것이 이윽고 밝혀진다.
「막연한 각오」에서 선경은 아들 오윤, 조카 유리와의 삼박 사일 홍콩·마카오 여행을 떠난다. 이미 품을 떠났거나 떠날 예정인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이번이 마지막일 거라는 예감이 든다. 하지만 아이의 어설픈 결정을 바로잡고자 하는 어머니의 본능은 도리어 이제껏 위태롭게 이어온 평정을 깨뜨리고 만다. 마카오타워로 걸어가는 무거운 침묵의 걸음 끝에 어머니가 자식을, 자식이 어머니를 이해하는 어려운 사랑의 과정이 펼쳐진다.
사랑이 여러 모양을 가지듯이 삶에 새겨진 깊은 권태와 회의에도 불구하고 새로 피어나는 관계가 있다. 「사구미 해변」과 「파푸아뉴기니 행성」에는 의지할 데 없이 공허하고, 아픔으로부터 채 회복되지 못했거나, 삶을 허비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다. 서투른 삶을 살아가는 그들은 같은 아픔을 겪는 서로에게 공명하면서, 다가오는 삶을 향해 자그마하나 확실한 희망을 내비친다.
표제작 「굿바이 R」은 전경린이 자신의 인물들, 그리고 그들을 닮은 우리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소설이다. 소설가 혜란은 더이상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자신이 쓴 소설 속 인물 R에 대한 꿈에 시달린다.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떠나 도착한 발리에서 혜란은 아이를 잃은 뒤 전남편을 찾아 온 호연을 만난다. 호연의 전남편을 함께 찾는 동안 혜란은 R이 호연을 포함해 그간 마주친 모든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혜란은 R을 이해해가는 동안 자기에게서 R을 떠나보낼 방법과, 그로써 스스로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예감한다.
전력을 다해 주어진 삶을 살아내거나, 아니면 송곳 같은 현실 위에서 홀로 버텨야 하는 삶. 그리고 공통의 현실 위에서 저마다의 방법으로 살아온 누군가의 삶과 마주쳤을 때, 그것을 진심을 다해 이해하는 과정. 나는 『굿바이 R』이 그 과정에 대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귀퉁이에 가꾼 붓꽃 화단 같은 것을 소설의 도처에서 발견하게 된다.
_서영인(문학평론가)
『굿바이 R』에는 일말의 낭만을 배제하며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건조하고 황량한 현실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을 점차 메마르게 만든다. 그러나 소설 속 인물들이 현재를 똑바로 대면하며 어떠한 타협 없이 자신의 삶을 찾아 나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귀중한 본보기가 된다. 전경린의 소설은 여성이 품고 있는 다양한 파문과 나이테의 모양을 정직하게 대면한다. 정상성으로부터 일탈하려는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소중한 여성들은 그 양면성만이 열어젖힐 수 있는 자유로 과감히 뛰어들었다.
그리고 자유 뒤에 이어지는 시간이 있다. 이혼한 부모를 오가며 홀로서기를 준비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엄마, 더이상 몸도 마음도 두근거리지 않는 “텅 빈 데이트의 유령”(「합」)인 중년의 남녀, 더 나아질 희망이 보이지 않는 무채색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들. 그들이 도달한 막다른 골목에서 전경린은 “막연한 각오”와 “근성”(「막연한 각오」)을 주목하고 길어낸다. 『굿바이 R』은 전망이 불투명한 현실에 발을 내디딘, 또는 한참을 기우뚱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모든 존재가 끝내 “지나간 시간이 모두 수렴되는 긍정의 지면”(「굿바이 R」)에 다다르는 과정을 끈질기게 따라간다. 그렇게 소설은 삶에 대한 치열한 체험이자 찬란한 응원으로서, 생의 초행길을 걸어가는 이들에게 동반자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