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컬 나이트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한국 문학의 보석, 조예은 신작 소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넌 대부분 한심하고 가끔 사랑스럽지만 잘 살 거야.”
《트로피컬 나이트》는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이야기다. 수록작 〈고기와 석류〉를 예로 들면, 이렇다. 남편이 죽고 아들도 떠나 혼자 남은 노인이 있다. 노인은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우연히 만나고, 괴물을 집 안에 들이고야 만다. 노인은 괴물에게 잡아먹히게 될까? 아니다. 조예은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그의 소설은 힘든 삶을 힘들다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공포를 보여주지만 공포가 우리의 삶을 갉아먹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어쨌든 삶은 계속되니까. 소설이 끝난 뒤에도 이야기는 이어지니까. 이야기가 계속되는 한 조예은의 인물들은 끝까지 살아내고 버틴다. 삶이 계속되는 한 조예은의 이야기는 반드시 밝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신작 소설 《트로피컬 나이트》 또한 그렇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소설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한 후,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칵테일, 러브, 좀비》 《스노볼 드라이브》 등을 펴내며 차곡차곡 독자들의 사랑을 쌓아온 조예은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총과 칼, 선혈과 비명 너머에 자리한 온기를 포착한 첫 단편집 《칵테일, 러브, 좀비》에 이어,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에서는 애틋하고도 경쾌한 디스토피아 세계를 선보인 바 있다. 《트로피컬 나이트》는 조예은 특유의 독특한 판타지성을 가미한 호러/스릴러풍의 직설적이고 유머러스하면서도 사랑스러운 괴담 여덟 편을 담았다. 기존 작품에서 더 확장된 조예은 월드의 시작이라 할 만하다.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할로우 키즈〉
한 유치원의 핼러윈 연극 공연 날에 ‘유령1’ 역을 맡은 아이가 사라진다. 유치원 교사는 사라진 아이에게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아이는 왜 사라졌을까? 〈할로우 키즈〉는 짧은 소설이지만 작은 괴담에서부터 계급에 의한 인간소외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깊은 울림을 준다.
“이걸 어떻게 하지. 열대야가 심하니 얼어 죽지는 않을 테지만……”, 〈고기와 석류〉
남편이 죽고 아들도 떠나고, 이웃과 친구도 없이 혼자 남게 된 옥주는 장례식장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어느 날, 산발을 한 채 쓰레기통을 뒤지는 어린아이의 얼굴을 한 괴물을 만난다. 결국 옥주는 괴물을 집 안에 들이고 ‘석류’라고 부르며 돌보게 된다. 옥주와 석류의 기묘한 동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게 될까? 옥주와 석류의 이야기는 고독사의 의미와 인간다운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그냥 가만히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거지”, 〈릴리의 손〉
이야기 하나. 연주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기억을 잃는다. 이름도, 나이도 기억하지 못한다. 사고 현장을 찾은 연주는 그곳에서 기계 손을 줍는다. 연주는 기계 손을 고치기 위해 전자상가를 찾아가는데……. 이야기 둘. 릴리와 연주는 시공간의 ‘틈’으로 들어온 이방인을 구조하고 돌보는 일을 한다. 어느 날, 긴급 호출을 받아 현장으로 출동한 둘의 발밑으로 갑자기 시공간의 ‘틈’이 벌어지는데……. 한 세상과 다른 세상, 한 차원과 다른 차원에서 살아가게 된 연주와 릴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랑을 통해, 찾아 나서는 사랑이 아니라 기다리는 사랑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늘 누군가에게 복수하는 상상을 해”, 〈새해엔 쿠스쿠스〉
유리는 학교를 그만둔 채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집 안에 숨어 잠수를 탄다. 그런 유리를 설득하러 매일 엄마가 찾아온다.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엄마와의 실랑이가 계속되던 그때, 유리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나는 모로코에 있어’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모로코. 사막과 쿠스쿠스.’ 메시지는 사촌인 연우 언니가 보낸 게 분명해 보인다. 유리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결국 아무 메시지도 보내지 못한다. 하지만 연우 언니가 쿠스쿠스를 먹으러 가자고 했던 어느 날을 떠올리는데……. ‘유리’와 ‘연우’의 이야기를 통해 ‘여성’이라서, ‘자식’이라서 무시당하고 존중받지 못하던 일상의 폭력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널 등쳐먹어서 미안해”, 〈가장 작은 신〉
원인 불명의 급성 먼지바람으로 첫 대규모 사망자가 발생한 날,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수안은 그 뒤로 2년을 집 안에서만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수안에게 고교 동창 미주가 찾아온다. 다단계 회사에 다니는 미주의 흑심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자기도 모르게 점점 마음의 문을 여는 수안과, 처음의 나쁜 의도와는 다르게 영구 회원 가입 동의서만은 끝내 건네지 못한 채 죄책감에 시달리는 미주의 기묘한 만남이 아슬아슬하게 계속된다. 결국 미주는 수안에게 미안해, 라는 문자를 남긴 채 저조한 실적의 책임을 지고 야유회에 가게 되고, 연락이 두절된 미주를 찾아 수안은 2년여 만에 집 밖으로 나갈 결심을 한다. ‘먼지의 신’이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타인에 대한 편견에 갇힌 채 뿌연 삶을 이어가는 둘은, 잿빛 현재에서 희망이란 미래를 보게 될까? 수안은 미주를 구하게 될까?
“곰. 곰이야?”, 〈나쁜 꿈과 함께〉
‘나’는 몽마다. 인간들은 ‘나’를 통해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을 본다. 하지만 코를 골며 잠든 은성의 이불 위로 기어 올라간 ‘나’는, 눈알을 턱까지 늘어뜨린 채 목을 조르는 귀신도 아니고, 온몸에 화상을 입은 프레디 크루거도 아니고, 회칼을 든 살인마도 아니고, 거대한 괴물 개구리도 아닌, 핫초코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러운 갈색의 팔다리가 짧고 뭉툭한 곰 인형이 되고야 만다. 심지어 은성은 ‘나’를 와락 끌어안기까지 한다. 무시무시한 몽마인 ‘내’가 도대체 왜 ‘곰 인형’의 모습이 되고 말았을까? 공포와 불안의 기운만을 먹고 살았던 몽마는 은성을 만나면서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제가 고양이를 잃어버렸는데요. 혹시 이렇게 생긴 고양이 보신 적 없나요?”,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어느 날부터 고양이들이 집에서, 침대에서, 소파에서 사라지기 시작한다. 은하도 체다를 그렇게 잃었다. 고양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고양이 별로 돌아갔을까? 기발한 상상으로 그려낸 인간과 고양이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따스하게 그린다.
“만약 금지된 문이 나타난다면 여세요. 그게 당신이 살길입니다”, 〈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어느 날, 젊은 영주가 머리에 도끼가 박혀 살해된 채로 발견된다. 유력한 용의자는 영주의 부인인 블루. “아이는 파도를 닮은 푸른 곱슬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아름답게 자랄 것이오. 많은 이에게 사랑을 받으며 크겠지만 끔찍한 외로움이 아이를 기다리고 있소. 결국 무수한 피를 손에 묻히게 될 것이오. 남편의 목을 베고 구천을 떠돌 것이외다.” 한 노파의 저주를 받으며 태어났지만, 금지된 문을 열고 끔찍한 진실과 미래를 목격하면서 진짜 자신의 인생을 살기 시작한 블루의 잔인하고 슬프지만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한여름 밤의 젤리소다 맛 괴담집
《트로피컬 나이트》 속 정체불명의 주인공들은(괴물, 악마, 살인마, 외계 생명, 유령 등) 공포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소재에 그치지 않는다. 어엿한 ‘이야기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인간의 곁에서 연민을 느끼고(〈고기와 석류〉 〈나쁜 꿈과 함께〉 〈유니버설 캣숍의 비밀〉), 비참하게 살해당한 이들을 위해 기꺼이 살인마가 된다(〈푸른 머리칼의 살인마〉). 소설 속 ‘인간’들 또한 희생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닌 극복하고 성장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시도 때도 없이 먼지바람이 몰아치거나 시공간을 넘나드는 싱크홀이 생겨나는 세상에서도 사랑과 우정을 포기하지 않고(〈가장 작은 신〉 〈릴리의 손〉), 공포에 가까운 공허에 사로잡힐지언정 아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는다(〈할로우 키즈〉).
부드럽고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총천연색 마음으로 쓰인 소설집 《트로피컬 나이트》는 소름이 돋을 만큼 무서운데도 사랑과 다정함이 충만하다. 한여름의 트로피카나 스파클링 음료수처럼 짜릿하고 다채로운 이 이야기들은 올여름 더위에 지친 우리를 시원하게 위로해줄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의 침대에 악몽을 가져가겠지. 배를 채워야 하니 어쩔 수 없다. 오늘 밤, 또다시 그에게 가위를 걸고 꿈의 언어를 속삭여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을 보도록 하겠지. 어제와 같이 누더기로 변하는 곰 인형일 수도, 결국 다른 직원을 구했다고 말하는 카페 매니저일 수도, 집세를 달라고 재촉하는 집주인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예상보다 많이 찍힌 가스비 고지서로 변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왕이면 어제와 같이 곰 인형이었으면 좋겠다. 더 누더기여도 좋고 다른 인형이어도 되니 최대한 불쌍하고 귀여웠으면 좋겠다. 오늘은 가위를 일부러 걸 것이다. _본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