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나, 마들렌
세계는 조금 고상하고 많이 상스럽고
쓸데없이 비장하며 매우 구체적으로 실없는 농담이다
현실과 환상, 절망과 희망, 탄생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보적 이야기꾼 박서련 월드의 모든 것
2018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은 박서련의《체공녀 강주룡》이었다. 2015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지만 그가 처음 완성한 장편이자 첫 책인《체공녀 강주룡》으로 마침내“전혀 다른”소설이 도착했음을 독자에게 알렸다. “거침없이 나아가되 쓸데없이 비장하지 않고,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으나 자기 연민이나 감상에 젖지 않는 이 인물을 통해 우리는 전혀 다른 여성 서사를 만난다”라는 심사평에는 이 신예 소설가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녹아 있다. 이후 5년여 동안 박서련은 지치지 않는 상상력과 창작력으로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의 고른 지지를 얻어왔다. 소재는 물론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다방면의 글쓰기라는 실험과 모험을 감행했다. 성장과 투쟁의 서사에서 출발해(《체공녀 강주룡》) 너무 쉽게 악몽으로 변하는 청년 여성의 삶을 들여다보았고(《마르타의 일》) 낯선 이국에서 동명이인들과 연대해 사랑을 찾은 어쩌면 평범한 모두일 존재를 조명했으며(《더 셜리 클럽》) 이윽고 신용카드를 손에 쥔 미지의 마법소녀라는 전무후무한 캐릭터의 세계를 만드는(《마법소녀 은퇴합니다》) 등의 행보가 그것이다. 여성의 자유와 삶이라는 근원적인 고민으로부터 무한히 교차하고 확장해나가는 박서련만의 서사를 스스로 갱신하고 있다. 다변하는 세계를 꿰뚫는 시선, 무엇보다 문학 독자뿐만 아니라 영상에 익숙한 독자까지도 포섭하는 몰입감 넘치는 소설적 재미는 근래 한국문학을 이끌어가는 젊은 작가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두 번째 소설집 《나, 나, 마들렌》은 박서련이 확보해가고 있는 문학적 영토의 정수라 할 만하다. 좀비 아포칼립스, 극중극 판타지를 통해 보여주는 장르적 쾌감뿐만 아니라 모성 이데올로기, 여성의 몸과 노화, 상실과 애도 같은 더 깊고 넓어진 연대의 서사까지, 박서련표 소설 세계에서도 하이 스토리와 로우 스토리를 두루 포함하여 그 기세가 위풍당당한 7편의 단편을 엮었다. 2018년부터 2022년에 발표한 이 단편들은 현실과 환상, 절망과 희망, 탄생과 죽음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절묘한 소설 미학을 선보인다.
책장을 넘기며 연신 놀랐다. 와, 이게 어떻게 전부 한 작가가 쓴 이야기지? 박서련은 한 사람의 내면을 정말 그 사람으로 한참 살아본 것처럼 그려내는데, 신기하게도 다음 편으로 넘어가면 한순간에 또 다른 사람의 내면이 펼쳐져 있다. 무수한 마음들을 엮어 독자를 향해 쏘는 단 한 발의 화살. 《나, 나, 마들렌》은 그런 위력을 지닌 책이다._김초엽(소설가)
우리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체공녀 강주룡》이후 5년, 반전과 전복의 서사
《나, 나, 마들렌》에는 기이한 환상의 세계를 형상화한 단편들이 포진해 있다. 표제작이자 2023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나, 나, 마들렌〉은 그런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나’의 과자(여자) 친구인 마들렌은 지금 집에 없다. 그렇다면 나의 팔에 닿는 미지근한 건 대체 누구인가.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내 곁에 누워 있는 낯선 사람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언젠가부터 나는 ‘복수의 일인칭’으로 분열되고 한 명의 나는 출판사로 출근을 하고 또 다른 나는 과자 친구 마들렌을 위해 법정으로 향한다. 진정 나는 마들렌을 사랑할까, 사랑한다고 생각할까. 마들렌과 마들렌을 성추행한 소설가 사이에서 나의 진심은 무엇일까. 결국 증언을 해달라는 마들렌의 부탁을 거절하는 ‘나’는 또 다른 ‘나’로 분열되고 겁을 먹고 놀란 마들렌은 집을 나간다. 더 이상 쪼개지면 안 돼. 복수의 일인칭인 나는 식칼을 놓고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오직 운전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또한 한계 없는 상상력을 보여준다. 알 수 없는 바이러스 전파로 쑥대밭이 된 서울에서 탈출해 강원도로 향하는 여자. 오직 전진만을 반복하고 방해당할 경우 폭주하는 감염자들을 피해 식량과 잠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하루하루가 버겁지만 어쨌든 차가 있어 지금껏 살아남았다. 어느 날 밤 낯선 노크 소리 뒤에 나타난 남자애는 자기를 제발 데려가달라고 한다. 기묘한 동행에서 이들이 만난 세상의 끝은 어디일까?
〈김수진의 경우〉의 ‘김수진’은 성별 정정까지 완료한 트랜스젠더다. 엄마가 되고 싶은 수진은 이른바 ‘인공 임신 프로젝트’에 뽑혀 인공 자궁 이식 수술 실험에 참여한다. “자연 자궁이 없었던 나에게 인공 자궁을 이식하는 수술이 성공한다면 더 많은 김수진들이 엄마가 될 기회가 생기겠지” 어렴풋한 사명감까지 짊어진다. 수술 성공 후 정자와 난자를 공여받아 임신 단계에 들어가려 하지만 그 길은 순탄치 않다. 결국 심리적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트랜지션 전 자신이 얼려두었던 정자와 공여받은 난자로 자궁 내 착상을 유도하고 몇 번 시도 후 임신에 성공한다. 늘 수진을 지지했던 엄마와 이 험난한 출산을 함께한다. 여성이 된다는 것, 엄마가 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의 고정된 성 역할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돋보인다.
〈김수진의 경우〉가 특별한 상상력을 통해 탄생의 숭고함과 고난을 말한다면 〈세네갈식 부고〉와 〈마치 당신 같은 신〉은 애도와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세네갈식 부고〉 속 ‘나’는 대학 시절을 함께한 독특한 친구 ‘드바’의 장례식에 불참했고, 그를 애도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가 청춘을 보냈던 도서관에 방화하러 나선 참이다. 세네갈에서는 한 사람이 죽으면 그의 도서관이 불탄 것과 마찬가지라는 농담을 나눈 바 있어서다. 결기와 고집으로 생활 도서관 관장을 유지했던 그의 존재는 내게 피곤함을 안겼다. 자본주의가 급습한 대학 캠퍼스 내에서 효용성을 늘 증명해야 하는 생활 도서관의 위상이란 위태롭기 그지없어 그는 늘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대 이데올로기가 휩쓸고 지난 뒤 지성의 성전을 지키는 패잔병과도 같았던 드바의 “총체적으로 엉망”인 사명이란 무엇이었나? 나는 방화에 성공할 수 있을까?
〈마치 당신 같은 신〉 속 휴먼 다큐 제작사의 조연출 담당인 ‘나’는 희귀병 환자를 찍으러 내려간 고향의 병원에서 후배와 마주한다. 고향을 떠났던 사람과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이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공간에서 만난 셈.‘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싸움을 걸던 드센 그 초등학생 ‘한동희’는 불치병으로 하루하루 악전고투 중이고, 급기야 어릴 적 내가 내뱉은 죽으라는 말 때문에 자기가 진짜 죽을병에 걸린 것 같다니? 내가 “신일지도 모른다는 거”다. 아픈 것도 낫게 하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다고. 하지만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야말로 가장 잘되어 있을 테고 방송국에 납품할 최루성 다큐나 찍으러 다니지는 않을 거라는 말은 하지 못한 채,“그래” 대답하고 만다.
망해가는 세계 속 분투하는 개인들의 연대와 사랑
한국문학의 위풍당당한 미래, 박서련 소설이 열어갈 지평
〈한나와 클레어〉 와 〈젤로의 변성기〉는 각기 자신의 자리에서 분투하는 여성들의 미묘한 감정과 연대, 사랑을 담았다. 〈한나와 클레어〉는 친구가 양도해준 미스터리 쇼퍼 바우처를 쓰고자 호텔에 투숙한 한나와 그를 응대한 룸메이드 클레어와의 신경전이 이야기의 주축이다. 질투와 선망의 애매한 경계에서 손님과 직원이라는 위치는 언제든 바뀔 수 있고 “그도 그럴 것이 한나와 클레어는 사실 옷만 바꿔 입는다면 누가 한나고 누가 클레어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서로 닮았다”는 사실은 기이한 아이러니를 낳는다. 계층간 심리, 사회적 가면으로 무장한 다양한 인물형 등을 꼬집는다.
〈젤로의 변성기〉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소년 주인공 목소리를 장기간 맡아온 50대 여성 성우와 실력은 별로지만 순정 만화 같은 외모에 팬덤이 막강한 20대 여성 신예 성우의 감정 교류를 극중극 형식으로 교차하며 묘파한다. 거의 평생을 소년 목소리로 살고 그걸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이에게 청춘의 후배는 눈부시고 사랑스럽다. “다시 한번 깨어날 수 있는 다음, 다음 순간이 더 이상 없다는 것. 낡아버린 몸에 소년의 음성을 지닌 여자 오선재의 몸을 영원히 벗어날 수 없다는 것”. 여성의 몸과 노화, 욕망을 섬세하게 파고드는 심리 묘사가 빛난다.
“꼭 선배님처럼 되고 싶어요.”그 말은 엄마 같다는 말보다 훨씬 슬펐다. 나처럼은 안 돼, 라는 말이 울음이 터질 듯 부풀어 좁아진 목 안을 자꾸 더듬어 나오려 했다. 왜요, 라고 묻겠지. 나처럼 되어선 안 된다는 말이 나처럼은 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리겠지. 저주라고 생각하겠지. 그렇지만 그 애가 이해할 수 있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꼭 나처럼 되렴 하고 별 마음 없는 덕담을 건넬 수도 없었다. 그거야말로 저주라는 사실을 내가 아니까._〈젤로의 변성기〉
박서련은 2023년 4월 한 인터뷰에서 여러 장르의 인물을 차용하는 것에 답했다. “기본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싶지 않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되 이전에 하지 않았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고. 장르와 소재, 형식 등의 유연함과 새로움은 이러한 각오에서 나오는 듯하다. 작가는 강력한 소설적 재미를 제공하면서도 매번 자신의 세계를 갱신해나가고 있다. 문학이 그들만의 리그에서 좀더 자주, 좀더 멀리 도약할 수 있는 건 이러한 부단한 갱신에서 비롯하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다채로운 서사, 흡인력 넘치는 전개, 밀도 높은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진짜 이야기꾼 박서련의 다음 행보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