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
원데이에서 20년 동안의 하루하루를 통해 영국사회의 변화를 보여주었던 데이비드 니콜스가 이번에는 유럽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어스는 젊은 남녀가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는 이야기와 20년 후 부부가 아들과 함께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벌어지는 이야기가 서로 얽히며 펼쳐지는데, 여기에 유럽의 도시와 미술관들이 제3의 주인공으로 그 역할을 톡톡히 한다.
게다가 내레이션의 주인공이 아티스트인 코니가 아니라 생화학자인 더글라스인 덕에 그야말로 객관적인 미술관 순례를 할 수 있다. 파리의 루브르와 오르세, 암스테르담의 라익스뮤제움과 렘브란트 하우스, 반 고흐 박물관, 피렌체의 우피치, 마드리드의 프라도와 레이나소피아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보는 미술관의 풍경과 그림은 그저 작품의 배경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다.
질서정연하고 실질적이며 능률적인 삶을 중시하는 생화학자 더글라스는 혼돈과 열정의 삶을 살아온 아티스트 코니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가족을 이룬다. 그와 그녀는 남편과 아내가 되고, 아빠와 엄마가 된다. 아이가 성장을 하고 다시 둘이 남게 될 즈음, 그는 그녀와 함께 나이 들고 함께 죽기를 꿈꾸지만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인생을 꿈꾼다.
더글라스는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바로잡고 싶어 하지만, 코니는 아무것도 잘못된 것은 없다고,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말한다. 더글라스는 코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지금까지와 똑같은, 변함없이 안정된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의 마지막 여름휴가를 완벽하게 보내야 했다. 아들을 위해 코니가 제안했던 그랜드 투어를 우리 생애 최고의 여행으로 만든다면, 어쩌면 떠나려는 코니를 잡을 수도 있을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