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와 진짜
최고의 단편소설 「무진 기행」의 문학성을 이어간
시대를 초월한 초단편 소설들
1960년대 초반에 등장한 김승옥은 지금까지 ‘감수성의 혁명’ ‘감각적인 묘사’ 등 한국 문학 사상 가장 화려한 찬사를 받았다. 전근대적인 도덕관념이나 세계관을 벗어난 자유롭고 기발하며 섬세한 소설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저명한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한국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김승옥 소설의 작품성은 특히 단편소설에서 빛났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무진 기행」을 꼽는다. ‘서울’과 ‘무진’을 현실과 이상으로 치환시킨 뛰어난 소설적 기법과 두 공간 속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내면 표현이 놀랍도록 세밀한 이 소설로 인해 김승옥은 ‘단편 미학의 모범’이라는 수식어 하나를 더 얻는다. 김승옥은 「무진 기행」에서 뽐냈던 이 재주를 초단편 소설에까지 이어간다.
김승옥의 초단편 소설집 『가짜와 진짜』에는 참신한 발상, 단편의 미학성이 돋보이는 작품 22편이 실려 있다. 대부분의 작품이 2~3페이지 내외로 매우 짧은데, 순간 포착한 인간 욕망과 양면성은 여느 장·단편소설 못지않게 뇌리에 박힌다. 누구나 공감할 인간의 감정을 정확하고도 예리하게 포착했고, 현시대에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사건과 배경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김승옥이 이루어낸 문학성을 확인하기에 충분한, 시대를 초월한 초단편 소설집 『가짜와 진짜』를 지금 만날 수 있다.
미발표작 「가짜와 진짜」수록
빼어나고 참신한 현실 풍자
1980년대에 완성한 주옥같은 작품 중에 어느 지면에도 실린 적 없는 미발표작이 바로 「가짜와 진짜」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기사화된 두 일가족의 죽음을 기술한 것이 전부다. 먹고살기 넉넉해진 현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 가난과 결핍으로 고통 받는 수많은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김승옥은 1980년대나 2000년대인 지금이나 우리가 외면해선 안 되는 현실의 슬픈 단면을 포착해냈다. 그에 대해 작가는 어떤 주관도 섞지 않고, 담담하게 보여주는 데에 그친다. 부족함 없는 쪽을 ‘진짜’로 알고 있겠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가짜’일 수도 있다는 현실에 대한 해석과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 채 말이다.
그 외에도 부부간에 신비를 유지하기 위해 알몸을 드러내지 않는 아내와 갈등을 겪는 ‘나’의 심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조마조마하게 조명한 「아내의 몸」, 어느 과부와 사랑에 빠져서 이혼하고, ‘우리 집 과부(이혼한 아내)’를 위해 열심히 돈을 벌어야 할 목적이 생겼다는 김수만의 아이러니한 사연을 다룬 「김수만 씨가 패가망신한 내력」, 낙태 수술을 하러 나선 어린 두 여자애의 방황이 절절하게 다가오는 「수술」등 매우 현실적인 인물과 사건으로 점철되어 독자들의 동감을 이끌어낸다.
김승옥은 「우리들은 주간지로소이다」와 「매끌이」에서 좀 더 색다른 현실 풍자 기법을 시도한다. ‘의인화’다. 「우리들은 주간지로소이다」에서는 ‘주간 농담’, ‘주간 스캔들’ ‘주간 에로’ 세 잡지들이 만난 사람들과 제각기 겪은 사건들을 이야기한다. 주간 농담을 만들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여유가 없다며 진담만을 원하는 기자, 사생활을 보장 받고 싶어 하는 대학 교수, 섹스를 감금하라고 외치더니 정작 주간 에로를 집으로 가지고 가 눈에 불을 켜고 읽는 대학생 등 잡지들은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일상의 양면성을 재기발랄하게 진술한다. 죽기 싫다고 몸부림치던 비누 ‘매끌이’가 사람들의 더러운 때를 벗겨줄 운명을 이를 악물고 받아들이는 과정을 그린 「매끌이」 역시 현실 속에 놓인 ‘나’의 자아정체성을 되새기게 만드는 소설이다. 의인화로 참신한 현실 풍자를 이뤄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출생하고, 1945년 귀국하여 전라남도 순천에서 성장하였다. 순천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60년에 대학에 입학해서 4·19세대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1962년 단편 「생명연습」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같은 해 김현, 최하림 등과 더불어 동인지 『산문시대』를 창간하고, 이 동인지에 「건」, 「환상수첩」 등을 발표하며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김승옥은 대학 재학 때 『산문시대』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환상수첩」(1962), 「건」(1962),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1963) 등의 단편을 동인지에 발표했다. 이후 「역사(力士)」(1964), 「무진기행」(1964), 「서울, 1964년 겨울」(1967) 등의 단편을 196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발표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울의 달빛 0장」(1977),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1979) 등을 간헐적으로 발표하면서 절필 상태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으며 1960년대적인 특징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잡았다. 1950년대 작가들이 견지하고 있었던 엄숙주의, 교훈적인 태도, 도덕적 상상력 등을 뿌리째 흔들어버렸다는 점에서, 그것을 동시대의 비평가들은 감수성의 혁명이라 불렀다.
김승옥의 소설은 대체로 개인의 꿈과 낭만을 용인하지 않는 관념체계, 사회조직, 일상성, 질서 등에 대한 비판의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기성의 관념체계, 허구화된 제도, 내용 없는 윤리감각이라는 일상적인 질서로부터 일탈하려는 열망, 곧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김승옥 소설의 중심적이고 일관된 내용이다.
김승옥의 소설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소설은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이 현실을 압도하는바, 낭만주의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환상수첩」, 「확인해 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생명연습」 등의 초기소설은 환각이나 환상을 쫓는 삶 혹은 현실을 초월한 삶에 대한 강렬한 동경이 두드러진다. 「무진기행」 이후 현실의 엄정한 법칙성을 인정하면서 변화하기 시작하며, 그의 후기소설은 초기의 아웃사이더를 향한 열정 대신에 꿈이나 환상을 잃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삶에 대한 환멸과 허무의지로 가득 찬다.
「서울 1964년 겨울」, 「야행」, 「차나 한잔」, 「염소는 힘이 세다」, 「1960년대식」 「서울 달빛 0장」 등 김승옥의 후기소설은 산업사회의 한 기호로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실감을 주로 형상화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로스적 열정으로 기성의 질서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이러한 의도를 담은 「보통여자」, 「강변부인」 등에서는 김승옥 소설이 지녔던 문제적인 성격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므로 김승옥의 작품 속 인물들은 반짝이는 빛의 내면과 동시에 속된 일상의 외관을 동시에 지닌 역설적인 인물들이다. 그들은 빛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일상 속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타락한 윤리와 무책임성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1960년대만 유효할 수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왜곡된 근대화의 모순 그리고 이에 대한 응전 방식으로 발화하는 새로운 엄숙주의 앞에서는 무력하게 좌초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승옥 소설은 감각적인 문체, 언어의 조응력, 배경과 인물의 적절한 배치, 소설적 완결성 등 소설의 구성원리 면에서 새로운 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4·19혁명의 열광적인 분위기를 문학적 언어로 환치시키면서 전후세대문학의 무기력증을 뛰어넘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2010년에는 순천문학관에 그의 생애와 문학 사상을 기리기 위한 김승옥관이 마련되기도 했다.
1. 아내의 몸
2. 한밤중의 작은 풍경
3. 산다는 것
4. 김수만씨가 패가망신한 내력
5. 크리스마스 선물
6. 수술
7. 삶을 즐기는 마음
8. 저녁식사
9. 정직한 이들의 달
10. 수족관
11. 우리들은 주간지로소이다
12. 반닫이 여인
13. 움마 이야기
14. 꼬마비누 매끌이
15. 숙이의 까마귀
16. 위험한 나이
17. 사랑이 다시 만나는 곳
18. 어떤 결혼 조건
19. 어느 남북회담
20. 손가락에 눈이 달린 여자
21. 햇볕과 먼지의 놀이터
22. 가짜와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