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1990년대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은 백민석은 10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그 명성을 이어가며, 최근엔 소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여전히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 그가 아르테 한국 소설선 ‘작은책’ 시리즈로 신작 『해피 아포칼립스!』를 선보인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단편소설과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장편소설로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보여주었던 그이기에 이번 경장편소설에서는 어떤 즐거움을 안겨줄지 기대된다. 작가는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아주 특별한 ‘종말의 밤’을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문학 작품에 나타나는 ‘종말’의 상상력이 따뜻하고 희망적일 리는 만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라는 수식이 붙는 종말은 어떤 모습일까. ‘공포’와 ‘악’에 관한 이야기라면 의심의 여지없이 믿고 보는 작가 백민석이기에, 이 천진한 제목 앞에 기대와 호기심은 더욱 높아진다.
이 작품은 “달나라에 첫발을 디뎠다고 난리가 난 지 70년도 더 지”난 때, “개포동을 지나 구룡산 중턱의 만 가족 타운하우스”에서 벌어지는 파티를 그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후, 서울의 강남에 위치한 ‘만 가족 타운하우스’로 향하는 차 안에서 혜주와 최가 나누는 대화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기상 이변으로 지구는 달아올랐고, 한낮엔 햇빛 때문에 민얼굴로 나갈 수도 없는 거리에는 배회하는 늑대인간, 좀비족, 뱀파이어 들이 구차한 삶을 연명하고 있다. 한데 이 모습이 허무맹랑한 상상의 결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불과 얼마 전 우리는 끔찍한 미세먼지로 덥힌 공포스러운 하늘을 경험했고, 그것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현실이다. 이상기후는 전 지구적 문제이며, 기후 난민에 대한 뉴스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긴 마찬가지다. 또한 가속화되는 미중 무역 전쟁의 유탄은 언제 한국으로 날아들지 모른다. 관세 부과로 중국의 대미 수출이 감소되면 중국의 경제 성장세가 둔화되고 이에 따른 피해가 한국으로 이어질 거라는 분석은 우리를 또 다른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이쯤 되면 작가 노트의 한 문장이 떠오르며 한 걸음 더 가깝게 와닿는 작품 속 상황의 섬뜩함을 지울 수 없다. “이 소설의 상당량은 오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소개
'엽기'라는 우리 시대 문화 코드의 한 대표적 사례로 여겨졌고, 충격적인 언어와 기괴한 상상력으로 일찌감치 문단과 독자들에게 충격을 준 작가이다.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5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내가 사랑한 캔디」를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르도 스타일도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으로 매번 바꾸어 가면서 쓸”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피비린내 나는 살인과 유혈 낭자한 이미지로 상징되었던 ‘엽기’라는 문화적 코드도 작가에게는 하나의 경향이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수림』,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에세이 『리플릿』 『아바나의 시민들』 『헤밍웨이: 20세기 최초의 코즈모폴리턴 작가』가 있다.
그의 작품에는 대부분 소년이 등장한다. 어른인 등장인물 역시 심리적으로는 소년인 상태의 어른들로 보인다. 현실의 인물을 기준으로 볼 때 기괴한 인물을 등장시킨다고 평가받는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반사회적’ 경험으로 인해 날렵하면서도 냉소적인 문체를 구사한다. 이러한 문체는 힘 또는 권력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는 최근 절필을 선언했다.
구체적으로 작품을 들여다보자.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는 유치함을 가장한 대담한 글쓰기로 주목을 받고 있는 백민석의 연작소설집이다. 작가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생산해내기 시작한 인류의 신상품들을 만화처럼 그리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음산한 해학과 통찰을 보여준다. 『내가 사랑한 캔디』는 백민석의 미혹과 파격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다양한 이미지와 비현실적인 시공간을 가진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발기부전에 시달리거나 동성애에 빠지거나 지강헌과 같은 총잡이를 꿈꾸는 '90년대 낙오자들'의 절망과 허기를 그려 내고 있다. 새로운 감성으로 세상을 해석하고 창조한 이 소설은 90년대식 소설의 가능성을 예고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죽은 올빼미 농장』의 주인공은 도심에서만 성장한 전형적인 '아파트먼트 키드'로, 이미 서른이 넘긴 나이임에도 '인형하고만' 대화를 나누며 어린 시절 들었던 자장가 가사에 집착하기도 한다. 작가의 전유물인 ‘인형’과 ‘복화술’을 기반으로 ‘아파트먼트 키드’라는 기형적 인간의 내면을 탐사해나가는 작가의 상상력에는 보다 순화된 ‘인간적 순정’이 느껴진다. 저자는 “아파트에서 태어나 유년을 보낸 아이들을 두고 내가 한 주장은 확신이 실린 것이 아니다. 아마도 소설 내적 원리에 충실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 주장들은 틀렸거나, 아니면 옳다 하더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고 밝힌다.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는 시종일관 유령이 출현한다. 그 유령은 동화적이거나 환상적인 귀신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그 자체다. 여기에 백민석이 말하는 공포가 있다. 그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그 공포로부터의 탈주이며 그 공포의 탈신비화 작업이다. 이 책에 대하여 평론가 손정수는 “백민석의 최근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곧 "직사광선 아래 놓아둔 빠닥빠닥한 알루미늄 포일처럼 쿨하면서도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그것이다. 일상화된 주체로서의 '나'에게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전조'처럼 다가오는 이 타자들의 세계, 그것은 텍스트화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도정 끝에서 백민석이 발견해낸 환각과도 같은 출구를 표상한다.”라고 평한다.
『목화밭 엽기전』는 납치, 린치, 강간, 살상, 포르노그라피... 시종 주위를 떠도는 언어들이 단말마의 비명 소리에 섞여 몸과 마음을 옭아매고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는 곳까지 철저하게 몰아세우는 충격적 소설이다. 문학평론가 황종연씨는 “『목화밭 엽기전』은 윤리가 부재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의 윤리적 가능성 자체를 조롱한다. 이를테면 인간이 야수의 상태를 넘어선 윤리적 존재라는 믿음은 작중인물들이 신랄하게 비웃고 있는 미신이다.”라는 평을 했다.
목차
◎ 목차 세상의 엉뚱한 방향 만 가족 타운하우스 부유한 빛 자살 전망대 부는 불평등하게, 리스크는 평등하게? 크림슨 라이즈 올 패밀리즈 전쟁인 것도 모르고 해피 아포칼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