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을 죽여라
루저들에 의한, 루저들을 위한, 루저들의 이야기
백수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소설가 구경미의 두번째 소설집 『게으름을 죽여라』가 출간되었다. 총 아홉 편의 단편이 실린 이번 소설집에서 작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이곳의 사회적 현실을 아무런 과장 없이 있는 그대로 응시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백수들, 그리고 백수와 다를 바 없는 무력감과 패배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그들은 게으르고 싶어서 게으른 게 아니었다!
『게으름을 죽여라』의 주인공들은 모두 ‘주류’에서 조금씩 벗어나 있다. 그들은 아버지와 결별까지 하면서 로커(Rocker)가 되겠다는 큰 꿈을 품지만 결국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은 채로 학원가를 전전하고(「뮤즈가 좋아」), 창업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디자이너에서 판매원으로 연봉과 대우가 강등되는 것까지 감수하지만 실은 창업 자금을 조달할 방법이 없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으며(「일주일」), 하루에 열 통도 넘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지만 단 한 번도 합격 통보를 받지 못한 채 ‘다 큰 게 방 안에서 뒹굴거린다’는 타박을 듣는다(「게으름을 죽여라」).
그러나 이런 상황이 그들의 탓인 것만은 아니다. 작가는 그들이 이처럼 ‘바보같이 살’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황들을 곳곳에 흩뿌려놓는다. ‘평범해지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기준들을 모두 통과해야 하고, 그 선 안에 들어가지 못하면 누구나 ‘패배자’가 되는 현실. 이로써 양산된 무수한 패배자들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부모들이고 친구들이고 자식들이며, 어쩌면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루저는 무엇으로 사는가 ― 유쾌하게 지옥도를 건너가는 방법
하지만 패배자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무조건 아프고 슬프기만 한 건 아니다. 작가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 당당히 맞서는 인물들은 담담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그려낸다. 그들은 자신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고민하고, 그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나가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이들은 삶의 의미는 아랑곳없이 사람의 가치를 오직 ‘성적’이나 ‘연봉’으로 결정짓는 세상에 대해 반항이나 무시의 제스처를 취하고(「게으름을 죽여라」), 무인도로 도피해버리거나(「2005년 6월, 귀덕과 애월 사이」), 아예 삶으로부터 퇴근하려 하기도 하고(「새로운 삶」), 주변 사람에게 자살할 날짜와 시간을 예고한 뒤 예고대로 여러 차례 자살 시도도 감행한다(「잠자는 고양이」).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위해서라면 지쳐 쓰러지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는 땀의 열기와(「뮤즈가 좋아」), 언젠가는 화려하게 부활해 날아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일주일」)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총체적 난국에도 불구하고 힘차게 건배를 외칠 수 있는 것이다. 패배의 쓴잔을 높이 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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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즈가 좋아」 나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과 땀에 전 상태로 무대 위에 있다. 악기 강습소의 행사에 초청되어 서게 된 조촐한 자리다. 로커(Rocker) 지망생인 나는 큰 꿈을 안고 아버지와도 결별한 채 음악을 하고 있지만 이제는 나이도 서른한 살, 실력도 인정받지 못하고 불러주는 곳도 없는 처량한 신세다. 오겠다고 해놓고 오지 않은 현욱을 내심 원망하며 노래를 부르던 나는, 갑자기 주위가 적막해지는 것을 느낀다. 눈을 뜨자 조명이 눈을 찌르고, 쓰러졌음을 인지한 순간 현욱의 얼굴이 보인다. 마지막에는 약속을 지킨 현욱이 덕에, 나는 편안히 눈을 감는다.
「독평사」 나는 타인의 소설을 읽고 그 글에 대한 평가를 해주는 독평사다. 처음엔 우연히 시작하게 되었지만, 조금씩 돈을 받다보니 어느 순간 일이 되어버렸다. 쓰기만 할 뿐 남의 글을 읽지는 않는 사람들의 글을 읽으며 지루한 생활을 이어가던 어느 날, 어떤 여자가 내 앞에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다. 휴가를 내고 친구 병문안을 할 겸 여행을 왔다는 그녀. 그런데 이 여자, 자꾸 이상한 내기를 걸어온다. 손목 맞기, 저녁 사기, 삭발하기 등을 걸고 벌어지는 내기에 나는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급기야 사 미터 높이의 벽 위를 걷는 내기를 하게 되는데……
「일주일」 매사에 계획적이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나는 현재 작은 회사에서 팬시용품 영업 업무를 맡고 있다. 원래는 잘나가는 팬시용품 디자이너였지만, 창업 준비를 위해 강등을 마다하지 않았다. 몇 달 혹은 일 년 뒤에 사장이 될 것을 생각하면, 적은 연봉도 잔소리가 심한 사장도 그럭저럭 참고 견딜 만하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다쳐서 일주일 정도 회사를 나오지 못하게 된다. 덕분에 마음 편하고 느긋하게 일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이상하게도 일에 흥이 나지 않는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일까.
「게으름을 죽여라」 할머니는 내가 하루에 열 통도 넘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쓰는 걸 봤으면서도, 게으른 것도 병이라며 나를 ‘게으름치료센터’에 보낸다. 그곳에서 나는 부모에게 반항하다 격리된 미조와 부모를 무시하다 끌려온 동화를 만나 친해진다. 센터의 규율을 조금씩 어겨가며 ‘문제아’로 낙인찍힌 생활을 하던 그들은 체육관 근처에서 생일파티를 하다 체육관에 불을 내고 만다. 과실로 인한 화재는 그들의 착실하지 못했던 생활을 들먹이는 교장에 의해 방화로 둔갑하고, 둘은 몸수색을 당한 뒤 체육관에 감금되었지만 곧 사라져버린다.
「새로운 삶」 석 달 전 뇌색전증으로 쓰러졌던 그는, 팔다리가 약간씩 불편한 것을 빼고는 거의 멀쩡하게 회복되었다. 그 해프닝은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쓰러졌다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난 것을 삶이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그 말에 대해 생각할 시간을 벌기 위해 악기 강습소에서 드럼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드럼을 그저 치기만 할 뿐 도무지 치는 법을 배우려 하지는 않는다. 그를 가르치려다 지친 혜정은 결국 포기하고 자신이 일하는 바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가 계속 따라온다.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은자와 함께」 나는 동호의 어머니에게 동호의 뼛가루를 한 줌 얻는다. 그가 돌아가고 싶어하던 곳으로 데려다주기 위해서다. 친구보다는 훨씬 가깝고 애인보다는 조금 멀었던 동호. 동호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현실만큼 독한 소설을 쓰기 위해 독한 소재를 찾아다니던 그는 경험을 해봐야 한다며 독한 사람들과 험난한 현장을 찾아다닌다. 새벽시장 인부, 나이트클럽 웨이터를 하는 것으로 모자라 급기야 강도짓을 계획하기에 이른 동호는, 대부분 카드결제를 하는 대형마트에서 가장 붐비는 저녁 시간대에 강도행각을 벌이다 오 분도 안 돼 제압당하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잠자는 고양이」 그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자살을 예고한다. 취직이 되지 않거나, 승진이 되지 않거나, 여자친구와 헤어졌거나…… 하지만 신기하게도 최후의 순간마다 원하던 바가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그는 자살의 위기를 넘기곤 했다. 그런 그가 얼마 전부터는 직장도 그만둔 채 하루에 열네 시간을 넘게 자고 코밑수염을 양쪽으로 세 가닥씩 남겨놓고 깎으며 고양이 흉내를 낸다. 그러더니 또 자살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번엔 뭘 바라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가 자살하겠다고 한 시간이 되기 전부터, 나는 그의 동네에서 서성거린다. 그리고 자살하겠다고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삼십 분이 지난 다음에야 그의 집으로 뛰어가는데……
「거짓말」 키 165센티미터에 몸무게 팔십 킬로그램인 지희는 남자친구 얘기를 하다 ‘너는 없지?’ 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회사 사람들에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거짓말을 하고 만다. 결국 친구 윤주를 통해 남자친구 행세를 해줄 사람을 구한 지희. 그런데 이 남자, 키 크고 잘생기고 근육도 적당히 있고 매너까지 좋다. 지희는 그 ‘가짜 남친’을 ‘진짜 남친’으로 만들기 위해, 바람몰이를 해줄 가짜 친구들을 구하고 그에게 남친 행세를 한 번 더 부탁한다. 그런데 날씬하고 예쁜 애들로 구성한 가짜 친구들 앞에서, 그의 태도는 회사 사람들 앞에서 보였던 것과는 영 다르다. 지희를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지도 않고, 심지어 지희 곁에 앉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2006년 5월, 귀덕과 애월 사이」 오랜 동갑내기 친구인 소진, 경란, 선우는 친구 상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위해 제주도로 간다. 저녁에 도착한 그들은 민박집에 짐을 풀어놓고 나와 술을 마시며 각자의 힘들었던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술을 잔뜩 마시고 기분이 좋아져 즉흥적으로 간 바닷가에서, 그들은 빈 배를 한 척 발견하고 밧줄을 푼 뒤 배 위에 올라탄다. 배는 노를 저을 필요도 없이 스스로 바다를 향해 나아가서, 맥주를 마시다 쓰러져 잠든 그들을 어느 섬에 데려다놓는다. 사람이 보이지 않는 그 섬에는 집이 한 채 덩그러니 서 있고, 집 주인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쪽지가 마루 기둥에 붙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