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브레이크 호텔
2007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서진의 두 번째 소설
잃어버린 사랑의 기억을 좇아 시간의 미로를 방황하는 시간여행자들의 이야기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로 제12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한 서진의 두 번째 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이 예담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뉴욕의 지하철을 배경으로 잔인한 세계구조로부터 밀려난 인간 군상의 삶을 정교한 구성으로 형상화하며 찬사를 받았던 그가 4년 만에 내놓은 소설의 무대는 ‘시간의 통로’다. 등단작에서 이미 시간과 기억의 본질을 입체적으로 조감하는 공학적 글쓰기를 선보였던 그가 이번에는 아예 시간 속으로 들어가 공간을 확장해내는 모험을 감행한 것이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삶에 대한 아픈 기억과 사랑의 상처를 지닌 인간들이 모여 다시금 인생의 전환을 맞이하는 일종의 ‘드림머신’이다. 그곳은 꿈과 환각의 경험을 제공함으로써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희망을 이룰 수 있게 하는 시간여행의 ‘통로’인 셈이다.
이 소설은 ‘사랑의 기억’을 ‘시간의 영원성’으로 붙잡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열망을 포착한다. 그것은 그리움에서 시작되어 집착과 절망을 낳고, 급기야 과학적 상상력과 영원불멸의 종교적 믿음에 의지하는 양상으로 비유된다. 그러나 시간여행을 통한 기억의 채집도 종교적 구원의 약속도 그들의 상실감을 쉽게 회복시키지는 못한다. 잠시 도달한 듯 보였던 낙원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있다. 절망과 희망을 왕복하며 끊임없이 돌아가는 영겁회귀의 인생 속에서 우리 인간들은 모두가 시간여행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 우주적인 상상력에서 출발한 이 작품은 부산, 샌프란시스코, 도쿄, 마이애미, 라스베가스, 뉴욕 등 7개 도시의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모여든 사람들의 시간여행을 통해 현대인의 마음속에 깃들인 사랑과 소통에의 욕망을 감각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다.
사랑은 은밀한 비밀, 지독한 혼란, 영원한 백일몽……
각 도시를 횡단하며 사랑의 기억을 좇는 연인들의 기묘한 판타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로 배치된 「황령산 드라이브 1?2」는 이 소설의 입구이자 출구로 제시되고 있지만, 사실 어느 것이 입구이고 출구인지 알 수 없는 뫼비우스 띠처럼 작용한다. 프롤로그에선 여대생인 주인공이 미모의 물리학 여자강사에게 데이트를 신청해 하트브레이크 호텔에서 섹스를 하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보여준다. 동성애라는 아슬아슬한 사랑으로 소설은 포문을 연다.
「두번째 허니문」은 옛 허니문 장소였던 샌프란시스코에 자살하러 온 노인의 이야기다. 노인은 이혼하여 사별한 옛 중국인 아내와의 시절을 회상하며 ‘Chew-X’라는 약을 먹고 눕는다. 그러나 눈을 뜨자 갑자기 시간을 거슬러 올라 신혼 시절로 돌아왔다. 옆에는 사랑스런 부인이 누워 있고 그는 앞으로 다가올 부인과의 이혼을 막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힌다.
「당신을 위한 테러」는 헤어진 연인을 찾아 난생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탄 일본 아가씨의 꿈을 보여준다. 미국의 공항에 도착해 자신의 가방에서 테러용 폭탄이 터지는 순간까지 그 모든 시간들은 애인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사랑의 구원을 갈구하는 고독한 20대 오피스걸은 어느덧 애인의 맹신도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사랑은 테러처럼 치명적이고, 종교처럼 중독적인 것이다.
마이애미 건달에게 벌어진 12시간 동안의 이야기「구원의 날」은 과거도 미래도 없이 오직 순간만을 살아가는 먼지 같은 존재들의 불안한 시간을 포착했다. 큰돈을 만져보겠다는 심산으로, 하트브레이크 호텔에 들어간 남자의 가방을 탈취해오는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자마자 건달의 인생은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 비정한 세상에서 진정한 구원은 죽음밖에 없는 것일까?
「미래귀환명령」은 시간여행과 꿈, 영원성에 대한 SF적이고 낭만적인 이야기다. 엘리사는 우연히 인터넷으로 채팅을 하면서, 자신이 미래에서 보내진 시간여행자라는 정보를 접하게 된다. 처음엔 장난처럼 받아들였던 엘리사는 논리적이면서도 간절한 채팅 상대의 설명에 설득되어간다.
「휠 오브 포춘」은 라스베가스를 배경으로 청춘 남녀의 애증과 다가올 미래를 두려워하는 젊은이의 심경을 다층적으로 그려냈다. 이룰 수 없는 것을 꿈꾸면서도, 막상 현실에 다가서는 게 두려운 청춘들은 운명에 전부를 거는 편이 차라리 매혹적이다. 도박과 몽상을 좀비라는 괴물로 형상화했으며, 쓸쓸한 비장미가 감도는 영화적인 소설이다.
「내 머릿속의 핸드폰」은 작가의 소설 작업을 비유한 일종의 메타픽션으로 뉴욕에서 소설가와의 만남을 꿈꾸던 여성의 좌절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하트브레이크 호텔』의 집필 의도와 그 과정들을 추정하게 만든다. 더불어 소설에 대한 작가적 신념도 알레고리의 형태로 개진되고 있다.
에필로그 「황령산 드라이브 2」는 ‘하트브레이크 호텔’이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통로임을 최종적으로 선포하며, 끝끝내 사랑을 놓치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와 희망을 보여준다. 그간의 시간여행을 통해 세상 모든 것이 다 쇠락하고 변해도 사랑의 기억, 사랑의 속도만큼은 영원 쪽을 향해 있음을 화자는 역설하고 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기억의 우주에서 벌어지는 사랑과 구원의 탐색!
장르적 상상력과 공학적 구성으로 경계를 횡단하는, 새로운 세대의 문학
이 소설은 외형적으로 ‘시간여행’이라는 SF 성격을 띠고 있고, 따라서 평행우주론 같은 현대물리학에 근거한 과학적 상상력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예컨대 이 소설에서 시간여행의 방법은 ‘Chew-X’라는 약물을 통해 기억을 파고들어 인위적으로 꿈을 꾸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하는 과거의 어느 한 지점에 대한 기억을 극대화시키거나, 미래의 이상적인 시간 쪽으로 재조립된 기억의 편린들을 이동시키는 식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공간을 무력화하기 위해선 꿈과 기억 속에 새로운 이상향을 건설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작가의 회의론적 세계관은 두 가지 색깔로 변주된다. 장르적 문법을 차용한 하드보일드한 정서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는 정념에의 몰입이 그것이다.
고독한 현대인의 심연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진 기억의 우주 속으로 호출해 사랑과 구원의 희망을 탐색하고 있는 소설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몽환적이고 쓸쓸하다. 하지만 그 불가해한 작업이 공학적인 문법으로 완성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서진은 여실히 보여준다. 장르적 상상력과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맞물린 구성, 건조하면서 심플한 문장들은 서진이 기존의 한국 소설이 기대고 있는 ‘문학적인 것’의 강박에 얽매이지 않음을 증명한다. 수시로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외국의 대중문학에 누구보다 민감한 그는 영상적인 이미지로 쉽게 다가오는 소설, 어느 나라에 번역이 되어도 이질감이 없이 읽을 수 있는 글로벌한 문학을 추구한다.
『웰컴 투 더 언더그라운드』가 현실 인식이라는 사회성에 두 발을 딛고 작가의 문명(文名)을 알린 작품이라면, 『하트브레이크 호텔』은 작가가 추구하는 작품의 색깔과 개성을 뚜렷이 각인시키는 소설이라 하겠다. 앞으로 서진이 발표할 작품들은 이보다 더욱 성격이 분명하고 미래지향적인 소설이 되지 않을까? 영상언어에 익숙한 젊은 독자들이라면 서진이라는 작가를 눈여겨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