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휴휴명당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선생이 30여 년간
온 강산을 누비며 답사한 명당 22곳
30여 년 넘게 우리 산하를 누비면서 천문天門, 지리地理, 인사人事를 공부하고, 그에 관한 저술 활동을 활발하게 펼쳐 온 강호동양학자 조용헌. 그가 우리나라의 영지靈地와 명당明堂 22곳을 엮었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큰 인물은 땅의 기운이 조화를 이룬 곳에서 태어난다)’이라는 말이 있듯 주변 풍경과 그 속에 사는 인간은 같이 돌아간다. 환경과 인간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의 마음이 갈수록 강퍅해지는 것은 어쩌면 콘크리트 건물이 사방을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풍광 좋은 곳에서 쉬고 놀고 배우며 삶의 에너지를 얻었다. 대표적인 예가 조선 후기 300년을 거의 집권했던 노론이다. 그들은 명산대천에서 호연지기浩然之氣가 길러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산속 계곡에 구곡을 지어 놓고 시시때때로 찾아가 기운을 받고 인생의 시름을 달랬다. 천지자연과 하나 되는 인생관을 가진 그들이었다. 또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음을 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힘을 기르기 위해 찾아든 곳도 대자연의 품이었다. 오랜 세월, 선인들이 힘을 키우고 만물의 이치를 깨닫고 휴식하고 시름을 달랬던 그곳은 어디일까. 그곳이야말로 오늘날, 마음의 배터리가 방전된 현대인들에게 더욱 절실하지 않을까.
명당은 밝은 기운으로 가득 찬 땅
‘명당明堂’은 하늘과 땅, 바위와 물, 바람과 빛의 조화가 이뤄진 곳이다. 바위에서 기운이 품어져 나오고, 주변을 물이 감싸고 있어서 적당한 수분을 제공하고, 바람을 잘 감싸주면서, 숲이 우거져 있는 곳들이 대개 영지이다. 그곳은 잠시 머무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눈으로 알 수 없는 기운이 몸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신령하고 신비롭다. 이러한 땅의 기운, 지기地氣는 가는 곳마다 다르다. 묵직한 기운, 단단한 기운, 붕 뜨는 기운, 밝은 기운, 침침한 기운 등. 나를 푸근하게 받아들이면서 생생한 에너지를 주는 땅이 있고, 어두운 기운이 밀려와 힘이 빠지면서 우울해지는 땅이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검증된 영지는 공통적으로 밝고 강한 기운을 내뿜는 곳이다. 바로 ‘명당明堂’이다. 명당 하면 묏자리를 떠올리곤 하지만, 명당은 뜻 그대로 ‘밝은 기운으로 가득 찬 땅’이다. 이런 곳에 몇 시간, 또는 며칠씩 머물면 몸이 건강해지고, 영성靈性이 개발된다. 기감이 발달된 사람은 10분만 있어도 이러한 기운을 느낀다. 예민하게 못 느끼는 사람들도 영지에 머물면 서서히 몸의 컨디션이 좋아지고, 마음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등산을 서너 시간만 해도 몸이 가벼워지는 이유도 이와 같다.
왜 사찰은 한결같이 명당에 자리하는가
인간은 약 1만 년 전부터 영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에겐 자연이 곧 신이었으므로, 땅의 기운이 가장 강한 곳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곳에서 머물며 기도하고 제를 올렸다. 이 정보는 대대로 후손에게 전달되었다. 이렇게 토착신앙으로 다져진 영지는 불교가 들어오면서 대부분 흡수되어 사찰의 일부로 자리 잡았으며, 동시에 승려를 중심으로 명당에 대한 풍수철학이 체계화되었다. 풍수란 하늘과 땅, 사람의 유기체적인 회통이자 우주적인 질서에 대한 파악이고, 이 질서를 따름으로써 궁극에는 자연과 인간이 상생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사찰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음을 얻은 데에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 영지의 역할도 결정적이었다. 풍수철학을 정립한 도선 국사를 비롯하여 원효, 의상, 진각 대사가 공부한 구례 사성암, 의상 대사가 죽기 살기로 공부에 매달렸던 관악산 연주암, 원효 대사가 수행한 여수 향일암,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35년 간 머물렀던 대구 비슬산 대견사 등 웬만한 사찰에는 고승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와 기록은 그 터가 명당이자 영지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보증서와 같다. 이 책에서는 보증서가 있는 곳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땅의 기운으로 인생의 해법을 찾다
명당에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서려 있다. 다산 정약용이 유배의 울분을 달랜 강진 백련사, 백범 김구가 승려로 머물면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공주 마곡사, 모두가 평등한 세상! 동학의 꿈을 발화시킨 고창 도솔암 마애불……. 그밖에도 대자유를 구하고자 한 고승들의 고독한 수행,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마음의 칼을 갈았던 지식인들의 고뇌, 오로지 하늘을 향해 목숨을 빌 수밖에 없었던 민초들의 간절한 기도가 명당에 전해진다. 수백 수천 년 전, 같은 자리에서 그들이 구했던 염원과 기도를 헤아리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자연스러운 깨달음에 닿게 된다. 선인들이 좇았던 마음의 행로行路를 더듬다 어느새 내 마음의 길도 뚜렷이 보게 되는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의 철인들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추구했다.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느낌을 받으면 ‘나는 왜 이 세상에 왔는가’에 대한 답을 얻는다. 그때부터 인간은 외롭지 않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 인간사의 온갖 불행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된다. 조용헌 선생은 말한다. “풍파 없는 인생이 어찌 있을 수 있을까! 누구나 다 말 못 할 고생과 파란만장을 겪는다. 이때 어디로 가야 할까. 바로 영지다. 인생의 허무감을 극복하게 해주는 대자연으로 가야 한다. 인생 헛살았구나 하는 탄식을 멈추게 해주는 그곳으로.”
휴휴명당休休明堂, 그곳에서는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여행은 왜 가는가?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갖기 위해서, 희망과 의욕, 마음의 평화와 정신적 충만을 채우기 위해서 간다. 이 모든 것을 충족할 수 있는 여행이 바로 영지 기행이다. 특히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영지 기행은 필수다. 중년은 숨 가쁘게 달려온 만큼 마음이 허전해지는 시기다. ‘문득 삶이 허무하고 천지간 나 혼자 있는 듯 외롭다. 열심히 뛰어왔지만 달라진 건 없다. 나를 위해 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최선을 다해 살았는데 더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지는 시기, 이때야말로 진지하게 몸과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 조용헌 선생은 이 시기에는 외부에서 기운을 보충 받아야만 한다고 충고한다. ‘외부’는 대자연이다. 자연이야말로 최고의 원기 회복제이다. 땅의 기운, 물의 기운, 하늘의 기운이 그득한 그곳에서 온몸을 누이고 모든 것을 내려놓아 보라는 것이다. 대자연은 당신이 누구건, 어떤 사연을 가졌건 부드럽게 안아주며 토닥거려 줄 것이다.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라고.
‘휴거헐거休去歇去니 철목개화鐵木開花라.’ 쉬고 또 쉬면 쇠나무에도 꽃이 핀다. 선어록의 한 구절이다. ‘휴휴명당休休明堂’, 진정한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이야말로 명당이다. 누구도 주인일 수 없는 자연의 에너지를 지혜롭게 이용한다면, 우리는 늘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106컷의 명당 사진과 22컷의 전통 민화로 힐링하다
이 책에는 명당의 생생한 느낌을 전달하는 106컷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영지의 신령한 기운을 담아내기 위해 어떤 사찰은 작가가 수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또 함께 수록된 그림은 우리나라 전통 민화이다. 단국대 미대교수를 역임한 이영수 선생이 소장한 작품이다. 대부분 100~200년 전 그림으로 추정된다. 자연 속에서 쉬고 놀고 휴식하는 그림을 보노라면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