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도시
이번 세기 들어 가장 매혹적인 판타지/미스테리가 왔다.
환상 속의 두 도시를 넘나들며 펼쳐지는 아주 특별한 문학적 성취
유럽 끄트머리 어딘가에 있는 도시 베셀에서 여인의 시신이 발견된다. 강력범죄 전담반 소속 티아도어 볼루 경위는 얼핏 보기에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 살인 사건을 맡는다. 이혼 전력도 없고, 담배도 끊었고, 폭력을 싫어하며 심지어 와인을 즐기는 주인공 형사. 그는 수사를 진행하기 위해 쇠퇴하고 있는 베셀시를 떠나 그 도시와 동등하고, 경쟁하는 위치에 있으며, 서로를 위협하는 관계에 있는 이웃도시, 즉 활기가 넘치는 울코마로 건너가야 한다.
하지만 두 도시의 국경을 넘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베셀과 울코마를 가르는 경계를 건너는 건 육체적인 동시에 정신적인 여행이고, ‘안보이는’ 것을 보는 행동이다. 볼루는 울코마의 형사인 쿠심 다트와 함께 옆 도시를 파괴하려는 국수주의자들과 두 도시를 하나로 합치려는 꿈을 꾸는 통합주의자들의 추악한 지하세계 속으로 뛰어든다.
두 사람은 죽은 여인의 비밀을 밝혀내는 경찰로 출발했지만 목숨 그 이상의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진실에 다가서게 된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베셀과 울코마 두 도시 안에서 살인도 불사하는 권력 ‘침범국’이다. 그 권력이 무엇보다 두려운 이유는 바로 두 도시의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지켜보는 ‘침범국’의 공포. 모든 비밀이 밝혀졌을 때,
비로소 이 소설은 마침내 가장 지적인 SF가 된다.
“필립 K. 딕과 레이먼드 챈들러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를
프란츠 카프카가 길렀다고 생각해보라.
차이나 미에빌의 소설 〈이중도시〉가 바로 그 아이와 닮았을 것이다.”
? 〈L.A. 타임스〉
하나이며 동시에 두 개인 도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타지와 범죄소설, 그리고 미스테리가 복합된 이 작품은, 마침내 시간이 멎은 듯한 추격전에 이어 모든 비밀이 밝혀졌을 때, 근래 보기 드문 가장 지적인 SF로 승화한다.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재미와 더불어 지적인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는 환상의 세계로 독자 여러분을 초대한다.
차이나 미에빌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로커스 어워드 최우수 판타지상, 아서 C. 클라크 상, 월드 판타지 어워드 최우수 장편상, 킷치스 최고 장편상, 휴고 어워드 최우수 장편상을 수상했으며 네뷸러 어워드 장편 소설 부문과 존 W. 캠벨 SF소설 부문에 후보로 오르는 등 출간 해에 영미권 SF 및 판타지 관련 상을 모두 석권했다. 2015년 6월 영국 BBC와 판권을 계약하고, TV 미니시리즈 제작에 들어갔다.
독서의 포만감을 가득 안겨줄 검증된 명품 소설, 이중도시
소설이 시작되면 독자들은 생소한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에 맞닥트린다. 여인의 시체가 발견된 살인 사건이다. 도시의 이름은 베셀이며 사건을 맡은 사람은 강력범죄 전담반 소속 티어도어 볼루 경위다. 인물도 공간도 이질적이다. 독자들은 소설을 보면서 이 공간이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읽다보면 유럽의 어딘가로 생각되고, 동부유럽 어딘가 일지 모르겠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독자들은 볼루 경위 등 등장인물들이 ‘무언가를 의식적으로 안 보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를 종종 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것이 소설의 주제와 큰 관련이 있을 거라는 예감을 받는다. 도시는 하나가 아니다. 베셀과 함께, 울코마란 이름의 도시가 더 있다. 두 도시는 비록 구역이 적당히 구분되기는 하지만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며, 통치권력의 관념과 국민들의 습속 속에서만 나뉘어져 있다. 구역만 나뉘어져 있을 뿐 별다른 장벽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서로를 보지 않는다.
그것이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두 도시가 둘다 적당한 통제국가이기 때문이다. 베셀은 1960년대 유신 이전 남한식 민주주의 국가 정도로 보이고, 베셀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울코마는 통일 이전 동독 수준의 전체주의 국가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베셀과 울코마의 사이에 침범국이란 기관이 하나 더 있다. 이 기관은 두 국가 사이에서 두 국가의 담을 넘는 사람을 ‘침범’이란 이름으로 처단하는 기관이다. 이 세 개의 미묘한 권력관계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살아가며, 이 권력관계 속에서 사건에 대한 수사는 진행된다.
두 개의 체제가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면서 관념과 습속으로만 나뉘어질 수 있다는 상상은 대단히 환상적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출발하자마자 살인사건을 통해 미스터리이면서 느와르이며, 시공간으로 인해 판타지가 된다.
분단 상황,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가진 한국 독자들에게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 지속이 될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현실성을 부여하는 것이 작가의 서술이다. 《이중도시》의 문체는 매우 아름답다. 무언가를 본다는 것, 무언가를 보지 않는다는 것, 무언가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 사이 어딘가의 경계에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파악하고 결정하는 것 등의 이 체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여러 가지 생활상들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등장인물들이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 다시 읽어야 하는 순간이 오지만, 거듭 읽으면 경탄이 온다. 말이 안 될 것 같은 제약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 군상들의 생생한 모습이 소설 속에 현실성을 부여한다.
볼루 경위는 우리에게 이 미묘한 감각들을 보여주기 위해 도시를 횡단한다. 베셀에서 시작된 사건은 울코마로 넘어가고 울코마로 넘어간 볼루의 시선에서 독자들은 ‘보던 것을 보지 않고, 보지 않던 것을 보는’ 체험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사건의 배후엔 오르시니라는 환상도시가 존재한다는 가설이 제기되고 침범국과 오르시니의 관계에 대한 의혹이 인다. 흥미롭게도 소설은 사건을 해결하면 할수록 환상적인 요소가 줄어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소설이 끝나갈 때쯤 우리는 여기에 사는 인간들이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며, 어딘가에는 이런 도시가 실제로 있을 수도 있겠다고 망상하게 된다.
차이나 미에빌은 기괴한 SF/판타지 작가로 유명한 작가다. 독서를 하면서 독자들은 내내 이 미스터리 느와르 판타지 소설에서 SF의 자리는 어디 있는지 의문을 지니게 될 것이다. 소설 말미에서, 놀랍게도 차이나 미에빌은 환상적인 요소를 거듭 걷어내며 획득한 그 현실성의 한복판에서 SF를 구현한다. 천천히 음미해야 느낄 수 있는 소설에 대한 포만감이 이 지점에서 극에 달한다.
경계를 넘어, 침범하라!
《이중도시》는 분단 상황, 넘을 수 없는 경계를 가지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더욱 특별한 의미를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차이나 미에빌은 우화적 해석에 대해 선을 그은 바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소설을 우화로 해독하는 행위는 이야기에서 너무 많은 것을 끌어내려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안에서 너무 적은 걸 읽어내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 소설의 인간군상들에서 통일지상주의자, 비타협적 운동권, 〈환단고기〉 신봉자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떠올리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유비의 힘은 정확한 대응이 아니라 일종의 비끄러짐에서 존재한다. 이 소설의 인간군상들은 굳이 현실세계에 대입하지 않아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차이나 미에빌은 길게 쓰기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이번에는 독자를 위해 자신의 작품치고는 길게 쓰지 않았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독서의 포만감을 고급스럽게 제공하는 이 작가의 매력에 빠지게 될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의 다른 터무니없이 긴 소설에 도전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니 먼저 《이중도시》에서부터 출발하라. 보지 않던 것을 보고, ‘경계’를 넘어서 ‘침범’하라.
경고: 본 해설에는 《이중도시》의 내용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으니 작품을 끝까지 감상하기 전에는 읽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촘촘하고 정교한 틈새와 판타지의 미학
진화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있다. 간단하게 얘기하자면 (사람을 포함한) 동물의 심리 기제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해석하는 학문이다. 진화심리학을 인류에게 적용할 경우 사회, 문화, 윤리, 도덕 역시 해석의 대상이 된다.
진화심리학을 설파하는 학자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을 예로 든다. 미남과 미녀를 선별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으며 그런 기준은 왜 생겼는가, 도덕은 왜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리 잡았는가 등등. 물론 진화심리학이 그 모든 문제에 제시하는 설명이 옳은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진위를 구분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릴 것이다.
《이중도시》를 해설하는 자리에서 이렇게 서두를 여는 이유는, 우리가 사물과 관념을 범주화하고, 피아를 가르고, 내가 속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을 애써 나누는 행위를 선호하는 경향에 대해 진화심리학이 한 가지 설명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구분과 범주화에 익숙한 이유는 그런 행위가 생존에 유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류가 동굴에서 살던 시절, 무언가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사람인지 맹수인지 더 잘 구분했던 원시인은 더 오래 생존할 가능성이 클 것이고 자신의 유전자를 먼 후손에게 전달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반복되고 누적되면서 현대인들은 구분짓기와 차별화라는 특질로 무장한 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설명이다(여기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람의 구분 능력만 언급했으나, 실제로 이런 기제는 빛과 어둠, 양분의 농도를 판가름해야만 했던 단세포 생물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진화심리학적인 설명이 어느 정도나 정확한지는 모르겠으나,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구분하고, 구별하고, 차이점을 강조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는 잠깐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소개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직업을 말한다. 학생, 자영업자, 시인, 연극연출가…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이름을 붙이고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우리는 ‘70억 명 중 한 사람’에서 특정 직업군으로 구체화한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면 우리는 차이와 구분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어느 정도’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된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어린아이가 성장해서 사회의 일원이 되어가는 필수적인 학습 과정이기도 하다. 지식을 전달하는 일에는 순서가 있고, 우선순위가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이뤄 놓은 문화와 과학 기술상의 성과를 보면 분류와 체계화가 얼마나 유용한 도구였는지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용한 도구는 그 유용성에 비례해 해를 끼칠 수도 있다. 범주화는 정형을 낳고, 한 번 자리 잡은 정형은 깨지기 어려운 법이다. 이는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고, 현실적인 사회 계층 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른바 ‘정치공학’을 논하는 사람들은 (그 중에서도 특히 집권층들은) 이런 속성을 이용해 상대 진영에 조작된 프레임을 씌우는 악의적인 수법을 늘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창작물의 장르 구분이나 해석 역시 정형에서 벗어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도시 판타지란 무엇인가
《이중도시》는 그런 정형의 울타리들을 모조리 밟고 올라서려는 야심 찬 작품이지만, 처음 소개하는 자리에서는 역설적으로 전통적인 범주를 제시하며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중도시》는 어떤 장르에 속하는 소설일까? 아주 개략적으로 첫 모습을 전달하려면 ‘하드보일드 추리소설 형태를 빌린 도시 판타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시 판타지라는 말에는 자체 모순이 담겨 있다. 도시란 기술 문명과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판타지는 초현실, 이상현상, 신화, 전설이 머무는 공간이다. 도시 판타지는 그 둘을 결합한 장르로, 대부분은 현대인이 사는 도시 공간으로 신화나 전설 속 존재들이 침투하거나, 이미 침투하여 공존하고 있는 형태를 띤다. 흡혈귀가 술집을 운영하거나, 좀비가 하수구 속에서 살고 있는 미국 TV 드라마를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판타지 요소가 소극적으로 도시에 침투하는 경우, 흡혈귀나 요정이나 원혼이나 귀신들은 인간이 생활하는 공간을 빌려서 인간처럼 옷을 입거나 인간의 말을 하며 살아간다.
판타지가 더 적극적으로 침투한 경우, 비현실적 존재들은 도시 내에 독자적인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의 법률뿐 아니라 물리법칙이나 상식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다. 고전적인 판타지에서 중심인물이 장거리를 여행한 뒤에 신이나 악마가 지배하는 영역에 도달하는 것과 달리, 적극적인 도시 판타지에서는 그런 공간이 처음부터 인간이 활동하는 무대 속에 공존하고 있다.
한편 《이중도시》는 무대가 되는 공간의 성격 자체에 비현실적인 요소를 단단히 결합시켜 놓는다. 소설 도입부에서 중심 무대인 베셀과 울코마는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법이 지배하는 공간은 아니다. 주인공 티아도어 볼루가 살고 있는 현재의 베셀과 울코마는 어디까지나 두 도시국가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 인위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공간이다. 비현실성은 두 도시의 시민들이 비합리적이고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구분에 철저하게 복종한다는 데에서 발생한다. 적어도 소설이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그렇다.
그런데 베셀과 울코마는 판타지가 지배하는 세계 속 도시가 아니다. 이 두 도시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간대에, 이 세계에 존재한다. 공간상으로는 유럽의 어느 변두리 지역이다. 비현실적이라 할 만큼 강제적인 법률과 관습이 지배한다고는 하지만, 2015년에 이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베셀과 울코마의 기묘한 공존을 보며 자원과 민족과 종교와 관습과 정파 때문에 끊임없이 피를 흘리는 여러 나라를 (조금만 세계정세에 관심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시점에서 이 책이 (어느 부분에서는 우리가 사는 한국을 포함한) 현실을 풍자하는 우화라고 짐작하게 될 것이다.
현실보다 더욱 현실로 귀착하는 판타지
작가인 차이나 미에빌은 읽는 이가 그렇게 단정 지으려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판타지 요소를 두 가지 더 투입한다. 베셀과 울코마의 고대사가 그 하나이고, 침범국의 존재가 또 하나의 요소다. 베셀과 울코마가 현재 형태로 공존하기 이전의 역사는 작품 속에서 밝혀지지 않는다. 심지어 두 도시국가가 한 뿌리에서 분리되었는지, 또는 더 많은 도시국가가 결합해 둘만 남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과거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사료와 유물에 바탕을 두어야 하건만, 울코마에서 주로 발견되는 유물 중에는 오파츠?(OOPARTS: out-of-place artifacts)?가 다수 섞여 있다. 오파츠란 추정 연대의 기술 수준을 넘어서는 비상식적인 유물을 가리킨다.
침범국은 또 어떤가. 침범국은 베셀과 울코마를 늘 감시하는 집단이다. 그들은 다른 사건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지만 ‘침범’ 행위가 발생하면, 다시 말해서 적법한 절차를 거쳐 옆 나라로 가지 않은 상태에서 옆 나라를 보거나, 옆 나라의 소리를 듣거나, 옆 나라 사람과 상호교류하는 행위가 일어날 경우 홀연히 나타나서는 어딘지 않을 수 없는 곳으로 행위자를 납치한다. 침범국의 ‘화신’들은 오파츠임에 분명한 무기를 쓰고 일반 사람들로서는 흉내를 낼 수도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지만 총알에 맞으면 부상을 당하고 죽을 수도 있는 존재다. 주인공 볼루는 두 가지 감시체계를 늘 의식하고 산다. 하나는 베셀 집권자들의 도청과 감시, 또 하나는 침범국의 감시이다. 특히 침범국은 모든 사람을 모든 곳에서 도청하고 감시하는데, 소설의 종반에서 살짝 밝혀지는 바와 같이 그런 감시는 두 도시 시민들이 구분과 분리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성립된다. 따라서 침범국은 이 작품을 판타지에 단단히 연결시키는 고리이면서도 현실과 주제에 접붙이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여기에 더해 그처럼 모호한 두 국가의 특징과 정서를 너무나 세심하고 조밀하게, 현실적으로 묘사해 놓은 까닭에 울코마와 베셀은 해외관광지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즉 정말로 존재하는 것처럼 다가오게 된다. 미에빌은 이런 요소들을 시계 속 톱니바퀴처럼 정교하게 배치해서 ‘그 무엇이라고 단정 짓기 힘든 상태/공간/분위기’를 작품 속에 구현하기에 이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중도시》를 멀게는 켄 키시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가깝게는 프란츠 카프카의 《성》과 비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거기에 이 작품이 하드보일드 추리물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 또 하나의 모호함을 추가해준다. 이 작품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무게추가 ‘현실성’과 ‘판타지’의 양 끝에 매달려 있다고 할 때 하드보일드 추리물이란 요소는 둘 중 어디에 매달려 있을까? 하드보일드 느와르들이 흔히 매정한 도시의 뒷골목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현실성’ 쪽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하드보일드 느와르는 (이 책에 포함된 인터뷰에서 작가가 직접 밝히는 바와 같이) 그 자체로 이미 판타지다. 픽션이라는 한계 때문에 선천적로 판타지라는 이름표를 받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거기에 더해 장르가 확정되는 순간에… 굳이 표현하자면 (비현실성이라기보다는) ‘판타지성’이 덧붙게 된다. 그럼 추리물로서는 어떨까? 우리와 친숙한 추리물들은 현실적인 인과와 한계 속에서 범행과 해결이 진행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마할리아 살인사건은 본질적으로 베셀과 울코마의 비현실적인 규정과 생활 때문에 일어난 범죄이고, 그런 비현실성이 해결의 실마리와 근거가 된다. 진짜 범인과 볼루가 벌이는 추격전 아닌 추격전은 어떨까? 이 역시 베셀과 울코마에서만 가능한 범죄이자 추격전이고, 그 바탕에는 판타지가 단단하게 버티고 있다.
이처럼 베셀과 울코마는, 그리고 《이중도시》는 현실보다 멀고 판타지보다 가까운 어딘가에 존재한다. 차이나 미에빌의 전작을 볼 때 이는 다소 의외다. 미에빌이 쓴 초기 대표작들의 특징은 도시를 향한 애착, 적극적으로 도시와 인간에게 침투하는 판타지 요소, 대중적인 이야기 장치를 대중적이지 않은 방향으로 풀어나가는 기교에 있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바스-라그’ 3부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에 비해
《이중도시》는 절제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판타지 요소의 비중을 줄이고 있고, 결과적으로 우화, 또는 현실에 대한 조악한 은유라는 오해를 받을 위험을 떠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오해라는 사실은 한 걸음 떨어져서 《이중도시》의 얼개를 조감하면 알 수 있다. 캐나다와 미국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나라와 베셀/울코마의 관계, 하드보일드 느와르와 정통 판타지의 관계, 둘 중 어느 나라라고 규정짓기 힘들 만큼 조밀한 교차지역들… 주인공 볼루가 마할리아의 메모에서 진실을 캐내던 순간은 ‘특정 시기에 맞춰 방향을 가늠하려던 시도도 포기하고, 생각의 계통을 재구성하려는 노력도 포기’하고, ‘연대표를 만들지도 않고 각 책장에 적힌 내용을 있는 그대로만’ 바라볼 때였다. 《이중도시》는 클리셰가 적재적소에서 구현될 때 만족을 느끼는 판타지가 아니라 모든 클리셰들(에 더해서 현실이라는 이름의 클리셰들)이 아슬아슬하게 깨진 채 그 자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때 완성되는 판타지이며, 그 깨진 틈새에서 참모습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미에빌은 자신의 작품들을 (H.P. 러브크래프트를 연상하게끔) ‘괴이한 이야기(Weird Fiction)’라고 표현하곤 하는데, 《이중도시》는 판타지 요소의 적극성에 있어 그것과 조금 궤를 달리한다. 국내에서 한때 나돌던 용어로 ‘경계소설’이 있는데, 정작 처음부터 끝까지 국경 문제를 다루는 이 작품에는 그런 용어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침범국과 볼루는 국경 위에도, 국경의 양쪽 어느 한 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둘은 양쪽 모든 곳에 존재하든가, 혹은 그사이에 존재한다. 《이중도시》 역시 끊임없이 어느 한쪽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작품이다. 미에빌은 조형미와 완성도에 병적으로 집착해 그런 의도를 제대로 달성했으니, 독자 여러분께서도 그 두 가지를 통해 이 소설의 참맛을 느끼셨으면 한다.
그렇게 ‘사이’에 자리를 잡은 작품 《이중도시》는 로커스 어워드 최우수 판타지상(2010), 아서 C. 클라크 상(2010), 월드 판타지 어워드 최우수 장편상(2010), 킷치스 최고 장편상(2009), 휴고 어워드 최우수 장편상(2010, 공동수상)을 수상했으며 네뷸러 어워드 장편 소설 부문과 존 W. 캠벨 SF소설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