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문장 수업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다시 산다는 것이다!”
역사, 지혜, 영성, 문학, 철학, 예술, 사랑, 삶의 태도가
녹아 있는 라틴어 문장 수업
언어 속에서는 한 민족이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학습하는 것을 넘어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 생활방식, 세계관을 배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만큼 우리의 교양과 지적 세계를 풍부하게 해주는 언어가 있을까 싶다. 라틴어는 바로 로마 제국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로마가 어떤 나라인가.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나라로 천 년 제국을 이루며 전 유럽과 중동 그리고 이집트를 자신들의 언어와 제도로 개편한 국가이다. 서양의 정신세계와 학문, 종교, 법, 사회제도, 예술 등은 로마라는 저수지에서 라틴어를 통해 각 나라로 흘러들어 갔다. 따라서 라틴어를 배운다는 것은 서양 문명의 근간을 배우는 것과 다름없다 할 수 있다.
하루 한 문장씩 따라가다 보면
라틴어 원문이 읽어진다
라틴어가 이토록 근사하고 지적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막연히 ‘배우기에 어려운 언어’라는 편견 때문에 공부하는 데에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에 수원대학교에서 10년 넘게 라틴어를 가르치고 있는 김동섭 교수가 그간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누구나 쉽게 라틴어를 배우며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들여다볼 수 있는 ?라틴어 문장 수업?을 펴냈다.
저자는 라틴어로 기록된 경구, 속담, 격언 등의 문장을 소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라틴어 원문을 직접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기초 문법부터 차근차근 알려준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문장들은 ‘천천히 서둘러라 Festina lente’,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하라 Si vis amari ama’ ‘생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네 Media vita in morte sumus’ 등 그 문장 자체로 울림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문장이라도 원문 자체를 정확히 해석할 수 없다면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온전히 와닿지 않는 법이다. 저자는 다소 복잡한 라틴어 문법을 최대한 쉽게 설명하며, 한 단어 한 단어 독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구성했다. 이 책에 소개된 라틴어 문장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때와 장소에 어울리는 라틴어 한 문장을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삶을 위한 라틴어 강의
세계사, 문학인류학, 철학, 신화에 정통한 저자는 라틴어 원문의 정확한 해석과 더불어 각 문장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의미를 다채롭게 펼쳐나간다. 위대한 철인 세네카가 전하고자 했던 말에는 어떤 철학적 의미가 있는지, 고대 로마의 정치인 키케로는 어떤 맥락에서 자신의 주장을 설파한 것인지, 시인 오비디우스가 비유하여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인지를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풀어준다. 또한 로마 신화, 성경, 문학 속에 남겨진 문장들이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해줌으로써 교양적 지식과 재미에 더해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이렇게 저자가 들려주는 라틴어 이야기와 함께하다 보면 역사에 대한 지식은 물론이고 고대 로마인들의 문학, 신화, 종교에 대해 구석구석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인들의 사고방식과 삶의 태도 등을 배움으로써 지혜가 깊어지고 자신의 가치관이 좀 더 단단해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라틴어 문장을 배울 때마다 독자들의 품격과 교양의 수준이 한 층 더 상승될 것이다.
하루에 한 문장씩 읽다보면 라틴어의 실체와 고대 로마인들의 역사, 지혜, 영성, 문학, 철학, 예술, 사랑, 삶의 태도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읽을 때 꼭 필요한 라틴어 좌우명을 하나 소개하며 들어가는 글을 마치고자 한다. 필자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Festina lente! 천천히 서둘러라! _서문 중에서
? 책 속으로
언어 속에는 한 민족이 수천 년 동안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까닭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민족의 역사, 문화, 신화, 생활 방식, 세계관 등을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라틴어는 천 년 동안 번성한 로마 제국의 언어였다. 왕정에서 시작하여 공화정의 장년기를 보내고, 제정을 통해 전 유럽과 중동 그리고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었던 로마의 모든 역사가 라틴어 속에 들어 있다. 라틴어 속에는 갈리아(프랑스), 히스파니아(스페인), 브리타니아(영국) 속주에 살던 속주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다. _p.5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미래를 향하여 직선 위에서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와 시간의 깊이를 나타내는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하여 생각했다. 크로노스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고, 카이로스는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 시간을 말한다. 우리말로 구분한다면 크로노스는 ‘시간’이 될 것이고, 카이로스는 ‘시각’, 혹은 ‘때’가 될 것이다. 신화 속의 크로노스는 그 형태가 없거나, 간혹 수염이 긴 노인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제우스의 아버지인 크로노스(Cronos)와는 다른 신이다. 크로노스가 의미하는 시간이란 자연이 순환하는 시간, 즉 인간이 태어나서 죽기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 _p.23
그렇다면 운만 있으면 인간의 운명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사상가인 마키아벨리는 인간이 성공하려면 포르투나 말고도 비르투(Virtu)도 있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비르투는 도덕적 ‘덕성’이 아니라 포르투나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나, 자신의 의지를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포르투나가 인간의 운명을 절반 정도만 지배하며, 나머지는 비르투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쉽게 말해, 운만 좋다고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노력과 자기 극복을 통하여 인간은 성공한다는 것이다. _pp.43~44
기원전 4세기경 사람인 다모클레스는 시칠리아의 독재자 디오니소스 왕의 신하였는데 그는 왕의 자리를 항상 부러워했다. 그런 눈치를 챈 왕은 다모클레스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왕 노릇을 해보라고 권하였다. 다모클레스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왕좌에 앉았다. 그런데 자리에 앉아 위를 쳐다보니 날카로운 검이 말총에 매달려 있었다. 그제야 그는 왕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하고 힘든 자리인지 깨달았다. 디오니소스 왕은 자신이 쓴 문학 작품이 어느 누구의 작품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오만함을 키케로는 신랄하게 비판하였는데, 그때 그가 했던 말이 바로 “누구나 자기 것이 아름답다”이다. _p.123
로마인들이 만든 법의 골격이 이후 유럽 각국의 모범이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로마법의 명료성이다. 로마법에는 어떤 상징도 허용되지 않았으며 반복되거나 사족 같은 내용이 없었다. 두 번째는 로마법이 잔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법률은 철저한 절차에 의해 집행되었으며, 사형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자유민에게는 고문을 가할 수 없다는 원칙이 로마법의 출발점이었는데, 이 원칙을 다른 민족들이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다. _p.193
유일신을 섬긴 유대인들과는 달리 고대 로마인들이 실용적인 사상을 지닌 것은 다신교를 섬겼던 배경이 한몫했을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신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침서 정도였다고 할까? 성서에 보면 “인간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물질세계가 충만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영혼은 점점 황폐해질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충분한 돈이 있으면 빵뿐만 아니라 말씀까지 덤으로 가질 수 있다”라는 배금주의에 빠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_pp.196~197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모두 초심자이기에 웰다잉이 더욱 중요한 것이 아닐까? 죽음에는 연습이 없기 때문이다. 웰다잉의 진정한 가치는 편하게 죽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죽음을 맞이하는 준비가 아닐까? 고대 로마로 가보자. 많은 정복을 통해 제국에 영광을 안겨준 장군들에게 로마는 개선식을 베풀어주었다. 그런데 개선식의 후미에는 몇 명의 노예들이 “Memento mori”라고 외치며 행렬을 따라다녔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이 경구는 모든 인간은 죽기 마련이고, 이승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도 한낱 먼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대비하고 있으라는 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지금은 이 세상을 손아귀에 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영화라는 것도 부질없다는 말이다. _p.229
본래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 주위에 상존하고 있다. 아주 사소한 일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지 않은가? 이 세상에 올 때는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오지만, 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아무도 자신의 죽음을 기억해주지 않는 경우도 많다. 그렇기에 몽테뉴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을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는 신이 원할 때 언제라도 미련없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고《수상록》에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살아갈 날이 살아온 날보다 많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몽테뉴의 말은 공감을 덜 줄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회한을 가진 채 이 세상을 작별하는 것은 아닐까. _p.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