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자리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견, 고민실 첫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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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이 되기로 했다. 배우가 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다. 취업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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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레면서 우울하고 혼란스러우며 버거운
그 지난한 0의 과정을 견뎌내면
우리는 마침내 1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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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1이 되지 못한 세상 모든 0에게 바치는 조용한 응원
201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고민실 소설가의 첫 장편소설이 출간됐다. 등단작 〈쓰나미 오는 날〉에 관해 황종연 문학평론가와 김인숙 소설가는 “모더니즘 미학을 통과한 소설”이라 평한 바 있다. 《영의 자리》는 2021년 제26회 한겨레문학상 본심 최종 후보작이었던 두 작품 중 한 작품이다. 심사위원으로부터 “이런 문장을 쓰는 작가라면 한번 만나보고 싶다”라는 평을 받은 《영의 자리》는 적막한 바다 위에 떨어진 조약돌처럼, 고요하지만 섬세하고 깊은 파장의 문장을 가진 소설이다.
세상에는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아직 그 무엇도 되지 못하고, 어느 곳에서도 자리 잡지 못한 채 어렴풋한 느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특별히 되고 싶은 것이 없다고 해서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고, 남들만큼 평범하게 노력했지만 어째서인지 제 한 사람의 몫조차 지키기 어려운 삶. 이 책은 그렇게 아직 ‘1’이 되지 못한, ‘0.0000001’과 같은 존재들, 존재한다는 감각이 희미해지고 희미해져 유령에 가까워진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1보다는 0에 가까운 사람들이 머무는 자리는 어디일까. “설레면서 우울”하고 혼란스러우며 때론 버거울지도 모르는 그 지난한 0의 과정을 견뎌내면 우리는 마침내 1이 될 수 있을까? 저자의 따뜻하고 차분하며 때때로 고독하고 관념적인 시선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영(0)’의 세계에서 자신도 모르게 ‘영(靈)’이 되어버린 이들을, 위령제를 지내는 만신의 품처럼 조용히 또 조용히 어루만진다.
무엇이 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게을렀던 건 아니다. 남들만큼은 노력했다고 믿었는데 부족했던 걸까. 더 노력한다고 달라지기는 할까. 살아온 날보다 살아야 할 날들이 더 하찮아 보였다. _본문에서
“세상은 유령이 살기에
더 적합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덤덤하고 세밀하게 일상을 관조하는 유령의 글쓰기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주인공 ‘나’는 20대에 정리해고를 당하고, 급하게 이직한 회사마저 경영 악화로 폐업을 하자 돌연 ‘백수’가 된다. 학생, 대학생, 취준생…… 익숙했던 ‘생’의 자리를 박탈당한 나는 무엇이든 되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채용 사이트에서 발견한 한 약국에 취직한다. 나이 무관, 성별 무관, 학력 무관, 경력 무관이라는 채용 조건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임과 동시에 누구라도 대체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임을 ‘나’는 알고 있다. 면접 자리에서 만난 약국의 국장 김 약사는 대뜸 “유령이 또 왔네”라며 나를 유령이라 부르고, 나는 “상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유령이 되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고 또 한 명의 유령 같은 인물, 조 부장에게 일을 배우며 기꺼이 유령이 된다.
비슷한 약의 이름을 외우고, 처방전을 입력하고, 약값을 계산하고, 조제를 돕는 일상은 다른 듯 다르지 않게 흘러간다. 땅부자 할아버지, 문신 토시를 착용한 남자, 갈색 푸들을 데리고 다니는 할머니, 치약값을 깎는 중년 여자, 판피린을 사 가는 할머니 등 소설에는 실제 어느 동네, 어느 약국에서나 일어날 법한 상황이 핍진하게 묘사된다. 그 속에서 나는 사업 실패로 빚을 지고 이혼한 듯한 조 부장과 조금씩 친밀해지지만 역시 그 이상으로 관계가 발전하지는 않고, 자신의 20대에 깊은 영향을 끼진 ‘혜’라는 인물과 멀어지면서 거스러미 같은 상실의 날들을 담담하게 이어간다. 그렇게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은,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멍 자국조차 남지 않은 나의 모습이라거나, 문신 토시의 남자가 피를 철철 흘리며 약국에 찾아오거나, 한 중년의 여자가 김 약사를 향해 화를 퍼붓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토시가 피로 물들면서 검푸른색 용무늬가 지워져갔다.
─식겁하게 저런 걸 입고 다녀. 다시는 안 왔으면 좋겠네.
(…) 남자가 더듬더듬 지갑을 주워 일어섰다. 팔을 타고 흐른 피가 손목에 고이다 뚝 떨어졌다. 문을 흔들어대는 바람 소리가 황량하게 들려왔다.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기던 남자의 발에 차인 물건이 계산대 앞까지 굴러왔다. 장난감 달린 비타민이었다.
언제 유령이 됐는데요?
밀물이 다가오듯 얇게 깔린 물이 순식간에 차올라 실내를 가득 채웠다. 물속에서 두 개의 빛이 다가왔다. 미지의 생물이 입을 쩍 벌리고 내려와 나를 한입에 삼켰다. _본문에서
어렴풋한 존재들, 어렴풋한 사건을 관조하면서 그 이음새 사이사이 스파크가 일듯 벌어지는 조그만 환상들을 놓치지 않고 표현해내는 저자의 화법을 ‘유령의 글쓰기’로 부를 수 있을까. 한국문학의 새롭고 특별한 발견이 될 고민실의 서사는 소설의 주인공인 ‘내’가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살아온 유령 같은 삶과 대비되어 더욱 몽환적인 매력으로 다가온다.
“가끔 사진을 확대해볼 때가 있어.
어디선가 한 칸의 자리를 차지할 수밖에 없는 작은 픽셀이
모니터를 꽉 채우는 걸 보면 위안이 돼.”
아주 작은 존재들이 모여 이루는 픽셀의 바다
그렇다면 1이 되지 못한 0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0들의 존재감은 그렇게 흐릿하기만 한 것인가. 소설의 2장에 그 실마리가 담겨 있다. 나는 열심히 할 의지도 이유도 없이 다녀야 하니까 다니기로 했던 약국을 그만두고 회사에 취직하기 위해 면접을 보기 시작하고, 평소 활동하던 모임의 사람들과 함께 주말 집회에 참석한다.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0이 한데 모여 같은 곳을 향해 외칠 때, 그 소리는 분명 어떤 형태와 목적을 가진 ‘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말한다. 0은 어떤 값도 나타낼 수 없는 숫자이지만, “다른 숫자 뒤에 채워 넣기만 하면 얼마든지 큰 수를 표기할 수 있다”고. 픽셀처럼 작은 존재들이 모이고 모이면 ‘픽셀의 바다’와 같은 무언가가 될 수 있다고.
《영의 자리》는 과도화된 경쟁과 뛰어넘을 수 없는 불평등 속에서 더 좋은 자리를 점하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면서까지 아등바등 조급하게 살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작가의 말처럼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소설에 나오는 ‘나’가 무수한 영의 시간을 지나 회복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던 것처럼, 0도 하나의 삶의 단위이자 자리이고 그 자리를 숨 고르듯 지켜내다 보면 뜻밖에 기회나 사건에서 큰 전환점을 마주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의 이 이야기가 있어야 할 자리는 바로 우리 곁이 아닐까. 자신이 불투명한 삶 앞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누구나 공감할 수밖에 없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이므로.
영에 어떤 숫자를 더하면 영은 사라지고 그 숫자만 남습니다. 영에 어떤 숫자를 곱하면 그 숫자를 영으로 바꿉니다.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영은 영 외에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숫자에 기댈 때 영은 우주의 단위가 될 수 있습니다. _‘작가의 말’에서